한국일보

깨진 약속

2004-09-2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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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이 올 연말 육참총장 직에서 물러나고 5년 전 쿠데타 주도 때 약속한 민정이양을 지키지 않더라도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무샤라프는 민주화와 사회 개혁 공약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그가 뉴욕에서 부시 대통령과 만나기 며칠 전 이러한 위약 발언을 한 것이다.
부시는 회교국가의 민주화를 위해, 역대정권과 달리 편의주의에 입각해 권위주의적인 정권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무샤라프는 무서울 게 없다. 최근 워싱턴으로부터 전해진 시그널은 오히려 무샤라프를 고무시켰다. 부시 행정부 고위관리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정적을 탄압해 온 무샤라프를 나토 일원이 아닌 주요 맹방이라고 치켜세웠다. 미국은 파키스탄의 미래에 대한 무샤라프의 비전을 공유한다고 했다.
부시 행정부뿐 아니다. 존 케리 대선 후보도 파키스탄 문제는 민주화가 우선이 아니라고 공언했다. 9.11진상규명위원회는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정국안정을 위해 무샤라프 정권이 필요하고 미국은 이 정권을 앞으로 계속 지원해야 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왜 이토록 무샤라프를 아끼는가. 그가 알카에다를 추적하려는 미국의 의지에 공감하고 실제 이에 협력해서다. 무샤라프는 수백명의 알카에다 멤버를 살해했다. 자신도 두 차례나 보복 암살 위기를 모면했다. 무샤라프는 무슬림 세계가 온건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는 민주화를 수용하겠다는 뜻도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무샤라프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무샤라프는 알카에다를 공격하는 반면 아프가니스탄 접경 파키스탄 지역에서 활동하는 탈레반에 대해서는 무척 관대했다. 무샤라프는 핵무기까지 밀매할 수 있는 넥트웍을 방치했다. 이란, 북한, 리비아 등지에 폭탄 제조물질을 넘겨준 사실을 드러났는데도 조직의 지도자들을 사면하고 유엔 조사단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민주화를 약속하면서도 정당과 시민사회를 파괴하고 있다. 부시 정부 관리들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불안정한 파키스탄을 다루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 바로 무샤라프와의 파트너십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가 무샤라프에 대한 30억 달러의 지원과 연계돼서는 곤란하다. 양국의 진정한 파트너십은 민주화, 핵 확산 금지, 이슬람과격파 대응 등에 대한 진전정도에 따라야 한다.
부시행정부는 이러한 중요한 조치들에 무관심하고 무샤라프의 다른 행동들에 관대하다. 파키스탄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할뿐이다.

워싱턴포스트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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