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게 이렇습니다

2004-09-16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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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안도

며칠 전에 장모님이 오리건 셋째달 집에서 돌아가셨다. 그녀의 나이는 일흔 일곱이었다.
이일성이라는 이름으로 1927년 평양시 근교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집안에서 할머니의 응석받이로 자랐다 한다. 여자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던 그 시절에 ‘미스 리’는 미국인 선교사의 배려로 평양 신학대학까지 다녔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났을 때 신학생이었던 ‘미스 리’는 홀로 집을 떠나 남쪽으로 피난을 하였다. 남장을 하고 산길을 걸어 넘어오면서 낮에는 산에서 숨어 잠을 자고 밤에 걸어서 남으로 내려왔다 한다. 만약 북쪽 공산당에게 잡히면 남쪽을 돕는 적이라고 처벌을 받을 것이고, 남쪽 군인에게 잡히면 북쪽에서 온 스파이라고 처벌을 당할 그런 입장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서울로 걸어서 내려왔다 한다.
서울에 내려온 ‘미스 리’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교에 들어갔으나 다시 피난길에 올라야 하였다. 대학교 급우의 알선으로 전라남도 시골동네로 피난을 갔다가 그 곳에서 아내의 아버지를 만났다. 그 동네에서 초등학교 선생이었던 장인과 결혼을 하였다. 서로 좋아서 연애결혼을 하였지만 상상하기조차 힘든 시집살이로 결혼생활이 무척 힘들었다 한다.
그녀의 결혼생활의 어려움이 짐작이 간다. 북과 남이 만났고, 도시와 시골이 만났고, 현대와 구식이 만났고, 기독교인과 불교인이 만났다. 또 다른 어려운 점은 아이들이었다. 남자아이들을 선호하는 전통사회에서 맏며느리가 여자아이들만 다섯을 낳았다. 마지막에 아들을 낳았지만 시부모의 마음을 사기에는 부족하였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 교사인 아이들의 아버지는 매년 전근을 다녔기에 가정생활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한다.
여섯 자녀들을 혼자 키우신 장모님의 인생은 당신이 항상 말한 것처럼 책을 몇 권 써도 다 쓰지 못하는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그녀의 삶을 간단히 요약하여 보자면, 그녀는 교육과 신앙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평생을 수고하시며 살았다고 할 수 있겠다. 남편의 도움 없이 시부모의 반대를 물리치며 서울로 딸들을 보내 교육시켰다. 자녀들의 신앙을 위해 항상 기도하셨다.
내가 장모님을 처음 만났던 때가 1972년이었다. 그녀의 큰딸과의 결혼을 허락 받기 위해 만났다. 1978년에 장모님은 미국에 오셨다. 몇 년 동안 장모님은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았다. 나중에 처제들이 미국에 들어와서 장모님이 분가하신 후, 우리 가족은 기회가 될 때마다 그녀를 방문하였다.
1992년 장모님은 중풍으로 말을 못하게 되시고 전신불수가 되었다. 우리는 지난 12년 동안 그녀의 성품이 하나 하나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을 보는 슬픈 경험을 하였다. 장모님의 죽음은 슬픔과 안도가 함께 한 죽음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말로 할 수 없는 슬픈 일이다. 그러나 병의 고통에서 해방되고 전신불수로서 숨쉬는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을 남의 손을 빌려야 살 수 있는 처지에서 겪었을 고통이 끝난 것은 안도이다.
장모님이 돌아가시기 2주일 전에 나와 아내는 장모님을 방문하였다. 장모님과 보낸 마지막 시간은 나에게 유쾌한 추억이다. 아내와 나는 야윈 장모님을 휠체어에 태우고 신선한 공기를 쐬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태양열이 유난히도 따가웠기에 나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장모님한테 씌워 주었다. 나의 선글라스도 벗어 그녀에게 씌었다. 그녀의 마비된 다리가 땅에 끌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휠체어 발판에 묶었다. 그리고 처제 집에서 몇 블럭 떨어진 그로서리 스토어로 나들이를 나갔다. 마치 어린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밀고 가는 기분이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를 집으로 데려 가실 시간이 지난주에 왔다. 힘든 삶의 고통의 무게에서 벗어난 장모님에게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지난주 그녀에게 고별인사를 하였다.

<교육학 박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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