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에 무릎 꿇는 사회
2004-09-08 (수)
LA에 사는 한인이 며칠 전 더위를 피해 샌타모니카 비치에 갔다가 갑자기 볼일이 있어 황급히 화장실로 향했다. 입구 쪽에서부터 하나씩 둘러보았지만 사람이 들어앉아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더러웠다. 그런데 마지막 한 칸은 쓸만했다. 장애인용이라 멈칫했으나 이내 ‘비상사태’를 핑계삼았다.
잠시 후 이 한인의 앞으로 휠체어가 쑥 나타났다. 아무도 없겠거니 했던 히스패닉은 당황해 했다. 본의 아니게 장애인을 ‘물리친’ 이 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면서 “소리(sorry)” 했다. 이 한인은 당시엔 어려운 선택을 했지만 자신에겐 ‘선택’이었고 장애인에겐 애당초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지 멀쩡한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했다.
연 전에 UCLA 풋볼선수들이 장애인 자리에 주차했다 들통나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보통사람들보다 건장한 운동선수들이라 더욱 그러했다. 하기야 장애인의 권익에 등한시한 것이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만연한 금세기 고유의 풍속도는 아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장애인을 식량만 축내는 쓸모 없는 벌레 취급했다. 스파르타에서도 장애인을 국가에 해를 끼치는 존재로 간주했고, 장애인을 산에 내다버릴 것을 법전에 명시하기까지 했다. 로마인들은 종종 장애인을 강에 빠뜨려 죽이거나 귀족의 노리개로 전락시켰다고 한다.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억장이 무너지는 가슴앓이를 하면서도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죽어 가는 데에는 “그런가 보다”하며 덤덤해 하는 게 보통이다. 내 가족이나 이웃 중에 장애인이 없으면 땡볕에서 휠체어를 움직이는 장애인을 ‘소 닭 보듯’ 한다. 장애인 보호라는 원칙에 동의하면서도 눈앞에 닥치면 실리를 좇는 게 우리의 평균치다.
한인업소들도 예외가 아니다. 오래된 건물의 시설을 개조하려면 비용도 비용이고 수고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서 장애인 용 주차공간, 진입로, 화장실, 휠체어를 위한 여유공간을 마련할 엄두를 내지 않는다. 소규모 자영업자에게 장애인 시설 완비는 벅찬 과제다. 한푼이라도 비용을 줄여야 하는 영세업자들로선 무의미한 과외비용으로 여겨진다.
한인들은 비즈니스 운영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민사회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끙끙댈 때 비즈니스 탈세는 공공연히 묵인됐던 비밀이었다. 타운 경제 버팀목, 이민사회의 어쩔 수 없는 현실 운운하면서 탈법을 애써 외면해왔다. 지금은 70, 80, 90년대가 아니다. 탈세를 이민경제 디딤돌로 인식할 수 없듯이, 당장 어렵다고 장애인 시설을 뒤로 미루는 것도 명분이 서질 않는다.
자금이 넉넉해서도 아니고 장애인을 대변한다는 공익단체의 소송이 두려워서도 아니다. 돈을 뜯어내려는 일부 공익단체의 ‘완장 시위’에 분기를 억누르며 타협하는 업소의 딱한 처지를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장애인들에 대한 배려는 다른 요인들보다 앞세워야 한다.
장애인 시설을 갖추려면 부담이 되지만 할 것은 해야 한다. 지금 하지 않고 10년 뒤나 20년 뒤에 한다면 그 때도 똑같이 “하기 힘들다”는 말이 나올 것이다. 당장 손해가 난다는 인식도 문제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장애인에 대한 마음가짐이다.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풍토가 문제다.
장애인 시설 설치 여부는 업주에게는 ‘선택사항’일지 모르나 장애인들에게는 선택의 이슈가 아니다. 이는 장애인에 대한 특혜가 아니라 이들의 기본적인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규정이다. 장애인 시설을 갖추지 않는 것은 이들의 기본권을 박탈하는 것이다. 장애인 시설을 갖춘 업소라면 그 서비스 정신이 일반 고객에게도 행동으로 전해지고 알게 모르게 비즈니스에도 플러스가 될 것이다. 길게 보면 결코 손해나는 투자가 아니다.
장애인은 사회의 소수계다. 우리도 미국사회의 소수계다. 장애인의 고충을 외면하면서 얼마나 설득력 있게 소수계 권익을 외칠 수 있을까. 몸은 힘들어도 마음만은 건강하게 간직하려는 우리가, 몸 아픈 장애인들의 마음까지 아프게 해서야 되겠는가. 장애인을 내치는 사회보다, 장애인에 무릎꿇는 사회가 진정으로 승리하는 사회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