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브리프 케이스 목사

2004-08-26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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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지난주에 돌아왔다. 이번 여름 크리스천 라이프가 주최한 선교에 참여한 우리 가족은 르완다, 우간다, 부룬디에서 일하였다. 이번 선교행사에 한국에서 온 할렐루야 축구단 선수들과 LA에서 온 오페라 캘리포니아 어린이들이 동참하였다. 30명이 넘는 오페라 단원들은 교회들을 방문하며 공연하였고, 축구선수들은 여러 나라를 돌며 현지 축구팀과 게임과 전도집회를 하였다. 300여명의 한인 단기선교사들이 우간다 상기라는 선교지에 모여서 아프리카 선교 대축제 모임을 가졌다.
이번 아프리카 선교는 나로서는 네 번째이다. 나는 방문할 적마다 그 곳 실정과 문화를 조금 더 배우는 기쁨을 맛본다. 우리는 르완다를 거쳐 부룬디에서 세미나를 마친 후 우간다에서 머물었다. 행사 계획이 바뀌어 우리는 우간다에서 여섯 시간쯤 떨어진 작은 교회에서 세미나를 하게 되었다. 차가 설 적마다 밀어야 달리기 시작하는 고물 차를 운전하면서도 항상 싱글벙글하는 운전사는 하이웨이 한가운데에 수도 없이 많은 울퉁불퉁 파인 웅덩이들을 이리 저리 잘도 피하며 우리들을 무사히 이곳 저곳으로 잘 데려다 주었다.
세미나가 끝난 후 호스트인 데이빗 목사는 자기가 운영하는 중학교와 초등학교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첫 번째 방문한 학교는 중학교였다. 길가에 허름한 판자로 짜깁기하듯 지어진 빌딩 앞에 차가 멈추었다. 데이빗 목사가 차에서 내려 ‘엘 샤다이 중학교’라는 사인이 달린 건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선생인 듯 싶은 젊은 청년이 마당에 나와서 호루라기를 불자, 100여명의 학생들이 학교 마당으로 나와 집합하였다. 차려 자세를 하면서 줄을 선 학생들에게 우리를 소개한 후, 데이빗 목사는 학생들을 위한 격려의 말을 우리들에게 부탁하였다.
아내는 자신이 어렸을 적에 비슷하게 생긴 학교에 다녔고, 외부에서 손님이 올적마다 운동장에 집합하여 격려의 말을 들었던 일들이 생각난다고 말하였다. 두 번째는 교회 옆에 초등학교였다. 학교 마당 한가운데 자동차 바퀴에 사용되는 쇠붙이를 매달아 놓고 그것을 종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작은 여자아이가 마당으로 달려 나아가서 타이어 쇠붙이를 막대기로 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캔디 하나씩을 나누어주고 세미나 장소인 교회로 갔다.
외국의 원조를 받지 않고도 좋은 일을 많이 하는 데이빗 목사를 우리는 격려하려고 노력하였다. 왜 외국 원조를 신청하지 않느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웃으면서 외국 원조를 받으려고 노력하였던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신청서 시작부터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외국에서 오는 구호자금을 받기 위해서는 비영리기관을 운영하는 지방 정부 직원들에게 먼저 뇌물을 주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뇌물을 주면서 구호자금을 얻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목사들 중에 양심 없이 뇌물을 주면서 외국에서 들어오는 구호자금을 따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성도도 없고 교회당도 없는 목사들이 교회를 명함과 서류가방으로 운영한다고 한다. 그래서 우간다에서 이러한 목사들을 가리켜 ‘브리프 케이스 목사’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브리프 케이스 목사들은 구호자금의 3분의1일을 뇌물로 사용하고, 3분의1은 자신이 사용하고, 나머지 3분의1만이 구호사업에 사용한다고 설명하여 주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의 마지막 선물을 그에게 줄까 말까 생각하다 주기로 하였다.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올 때 나는 빈손으로 오려고 노력한다. 해마다 마지막 선교지에서 만난 목사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고 오는 관습을 만들었다. 선물 속에 스카치 테입, 스테플러, 볼펜 등 세미나에 사용하다가 남았던 학용품을 넣었다.
데이빗은 나의 마지막 선물을 받으며 고마워하였다. 나는 데이빗에게, “이렇게 하면 혹시 내가 당신을 브리프 케이스 목사로 만드는 것이 아니냐?” 하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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