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국가 통치에 적잖이 실망한 사람이다. 정상의 자리까지 올라간 비상한 정치 감각과 집요한 투쟁의 집념에 대해선 감탄을 금치 못하는 바이지만 막상 그가 청와대 집무실에 앉아 나라 일을 챙겨온 지난 1년 반은 안보쇠퇴와 경제후퇴와 국민분열이 가속화됐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특히 나를 크게 실망시킨 것은 국가 통치자로서 ‘절도’와 ‘금도’가 태부족하다는 점이다. 80년대 ‘청문회 스타’라는 정제되지 않은 정치인의 모습에서 별로 변한 게 없다는 게 나의 솔직한 느낌이다.
국가 정상에겐 많은 덕목이 요청된다. 겸손·솔직성·책임·희생·대의·포용 소명의식·균형감각, 준법의 총체적 정신철학과 실천의지를 갖춰야 한다. 너무 고답적인 표현이라면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이다. 대통령은 ‘대통령다워야 한다.’ 그 ‘대통령답다’는 판단과 평가는 전적으로 국민의 몫이다. 당사자의 생각은 의미가 없다. 하물며 대통령 주변의 지지자들이 입을 모아 외쳐대는 용비어천가가 무슨 가치를 갖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생각, 평판은 어떤가. 10명 가운데 2명, 좀 후하게 쳐 3명만이 ‘일 잘하는 대통령’이라고 칭찬할 뿐이다. 5~6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나머지는 가타부타 입을 다물고 있다.
‘일 잘한다’고 박수를 친 이들의 성분은 분명하다. 이념적으로는 진보좌파, 지역적으로는 수도권 이전으로 재미 본 충청도 사람들과 노무현 정권이 그래도 우리편이라고 믿는 일부 호남 사람들일 것이다.
‘못해도 이렇게 못할 수 있느냐’고 울화를 터뜨리는 이들은 십중팔구 보수우익, 김대중-노무현을 싸잡아 욕하는 영남 사람들, 선거 때 수도권 이전에 별 관심이 없다가 이제야 ‘어이쿠 이게 아닌데… 600년 도읍지를 천도해?’ 하면서 화들짝 놀란 수도권 사람들, ‘젊은이 봐준다기에 표 몰아주었더니 우리를 신용불량자로 몰아?’하고 칼날을 돌린 30대, 나날이 악화되는 경제불황에 직장을 잃은 40대 실직자들, ‘세계에서 기업하기 제일 좋은 나라 만들겠다고 말만하고 실제로는 기업 목 죄는 좌파정책만 밀고 나간다’고 볼멘 소리하는 기업인들, ‘이 나라 지킨 게 누군데 간첩 출신이 의문사윈가 뭔가에 조사관으로 버젓이 들어가 현역 군장성을 오라 가라 조사하고 간첩을 민주인사로 보상하라니 이게 무슨 해괴한 짓거리인가’라며 분기탱천하는 60~70대 노년층일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에 ‘금도가 모자란다’는 비판도 사실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지도층 인사들 입에서 벌써부터 나온 말이다. 어떤 이는 노 대통령 면전에서 ‘반대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라’고도 했고, 또 어떤 이는 ‘말수를 줄이라’라고 뼈있는 충고를 했다.
국회 탄핵 대상이 된 불명예의 너울을 쓰고 자신의 말대로 ‘답답한 터널’ 속에 갇혀 있다가 헌법재판소의 ‘용단’(?)으로 풀려난 직후엔 그래도 뭔가 변화가 올 것으로 기대들 했다. 이젠 금도 있게 행동하려나 하고 말이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입과 마음과 행동은 전혀 바뀐 게 없어 보인다.
대통령 직속기관인 의문사위의 ‘해괴한 결정’을 놓고 ‘대한민국 간판을 내리려 하느냐’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그는 의문사위가 ‘할 일했다’는 식으로 두둔했다. 언론, 정확히 말해서 보수언론을 향한 증오(?)도 절대 가시지 않은 듯하다.
‘광화문 주변에 거대 빌딩을 갖고 있는 신문사들’이 개혁의 걸림돌이라는 식으로 분노를 터뜨린 것이다. 광화문 네거리에 위치한 동아 조선일보와 조금 떨어져 있는 한국일보, 그리고 요즘엔 ‘조동중’에서 탈락했다는 평을 듣는 중앙일보를 겨냥한 말이라는 해석이 뒤따랐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언론을 ‘완장문화’와 ‘군림문화’로 비유하면서 ‘임기 말까지 철저하게 대처해 나가라’고 장관들에게 지시했다.
도대체 어떤 신문이 팔뚝에 완장차고 정권 위에 군림하고 있단 말인가. 노무현 정권이 지목한 보수언론들은 정권이 사활을 걸고 추진하고 있는 소위 ‘언론개혁’에 몸을 사리고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광고물량도 줄어들어 경영이 어렵다. 건물이나 영향력으로 치자면 국민 세금과 막대한 광고에 호황을 누리고 정권의 비호마저 받고 있는 거대 방송사들이 아닌가. 한데 이들은 못 본 채 하고 비판 신문들만 증오하는 말을 쏟아내고 있다.
완장부대란 표현도 그렇다. 그 말을 들을 사람들은 따로 있다.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한 대한민국의 국체를 바꾸려고 전의를 번득이는 “중국식 ‘홍위병들’이 청와대, 국회, 정부 각 부처, 말발 센 시민단체, 노조 등 온갖 곳에 배치돼 있다”고 보수진영은 주장하고 있다. 예로부터 ‘금도’가 부족한 통치자는 국민들로부터 존경대신 손가락질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수없이 보아왔다. 지금도 이것은 흔들리지 않는 진리다.
안영모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