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참전 한인 김주리 중령
2004-08-09 (월) 12:00:00
메릴랜드대 졸업 미군입대 27년 복무
“테러리즘 분쇄해야 세계평화 유지”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친 것이 가슴 아픕니다. 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이라크인은 물론 한국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어서 보람있었습니다.”
한인으로는 최고위직으로 1년 6개월간의 이라크 참전을 마치고 돌아온 김주리(52, 미국명 줄리 가드너)중령은 “이라크 국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전쟁을 수행해야 하기에 더욱 힘들다”면서 “미국이 테러리스트들을 제압하지 않으면 전세계가 테러에 시달린다”고 강조했다.
김주리 중령은 지난해 3월 쿠웨이트에서 3개월을 보낸 후 이라크 바그다드로 파견돼 미군정(CPA) 소속 군자문관으로 미군과 이라크 주민을 연결하는 대민업무와 함께 이라크 임시정부의 외무부 창설 업무를 담당했다.
전기 시설 및 식수 부족, 무더위 등으로 처음에는 적응이 힘들었다는 김 중령은 중년의 나이와 가날픈 몸매에도 불구 완전 군장에 중화기를 들고 다니며, 고된 군 업무를 소화해냈다.
1977년 입대, 육군 예비군 소속으로 27년째 군 생활에서 참전은 이번이 처음. 남편 역시 예비군 소속 군인이어서, 부부가 함께 참전하지 못하도록 한 군 규정에 따라 자녀 양육을 책임진 그는 계속 제외됐다. 그는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전장에서 안전지대는 없어 구사일생의 고비를 여러차례 겪어야 했다. 근무지가 보호지역인 그린존의 바깥에 있어 출퇴근시는 물론 근무시간 중에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다. 실제 근무 중이던 빌딩에서 폭발물이 터지기도 하고, 수 차례 공격을 받기도 했다.
외무부 설립에 관계하다보니 이라크 주재 각국 대사관과 접촉이 많았고, 자연스레 한국 대사관과도 친분을 쌓게 되면서 그의 ‘한국 돕기’가 시작됐다.
지난해 11월말 오무전기의 한인직원 2명이 이라크 무장단체의 총격으로 사망했을 때 한국대사관의 요청에 시신 한국 송환을 도왔다. 미국과 한국이 맺은 SOFA협정에는 항공부문이 제외돼 있어 시신 송환에 필요한 미군용기를 이용할 수 없었지만 김 중령의 도움으로 성사됐다. 이 일로 김 중령은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또한 나시리아 주둔 한국군을 모함하기 위해 군의관의 이라크 소녀 성폭행 사건이 조작돼 미군 당국에 보고됐을 때 이를 신속하게 한국대사관에 알려 사건이 확대되기 전 수습할 수 있도록 도왔다.
카메라의 화학물질이 미군 탐지견에 포착돼 KBS TV 취재단이 억류당했을 때도 한국대사관의 긴급 요청을 받고 풀려날 수 있도록 ‘힘을 써주기’도 했다. 김 중령은 “알맞은 때, 알맞은 장소에 내가 있어 어려움에 처한 한국 대사관을 도울 수 있었다”며 겸손해 했다.
김 중령이 군에 몸을 담은 건 메릴랜드대 재학시절 파트 타임으로 육군 예비군에 근무하면서부터. 졸업후 직장을 찾는 그에게 평소 그의 성실함과 능력을 높이 평가했던 예비군 상사들이 그를 채용했다.
애나폴리스 인근 크라운스빌에 거주하는 김 중령의 2녀 중 맏딸(23)은 조지아텍 졸업후 해군 항공학교에 입교해 어머니의 뒤를 이어 군인의 길을 걷고 있다.
김 중령은 “전쟁은 빨리 끝내야 한다”면서도 “미국내 미군 철수 여론이 높아지고 있지만 임시 정부가 안정되기 전 철수할 경우 기반이 약해 붕괴한다”고 조기 철군에는 반대했다.
휴가를 얻어 귀국한 가드너 중령은 오는 9월이면 다시 복귀하나 근무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다시 이라크로 배치되거나 아프가니스탄으로 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또한 9월이면 그의 동생인 김성근 박사(토목공학)가 미공병대 소속으로 바그다드로 향해 누이의 뒤를 잇는다.
<박기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