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4-07-21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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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우리 편집국 한쪽 켠에는 커피와 물을 마시는 작은 방이 있다. 싱크대와 커피 뽑는 기계, 그리고 비상약통과 애로헤드 물통밖에 없는 이 썰렁한 방에 게시판용 흰색 칠판이 하나 붙어있는데 거의 아무도 이용하지 않아서 ‘아무개 부친상 조의금 x일까지 완납하시오’ 등의 공지사항 외에는 썰렁하게 비어있는 날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지난 주 누가 이 게시판에 ‘커피’에 대해 한마디를 남기자 갑자기 너도나도 달려들어 두마디씩 써넣기 시작했고, 불과 몇시간만에 게시판의 자리가 모자라 글자들이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누군가 그 옆에 큼직한 종이를 붙여놓고 마음껏 쓰도록 배려했는데 그 대자보마저 좁아터지는 초유의 이변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편집국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남자기자들이 음식과 맛에 대해 매우 무신경하다고 무시해왔는데, 커피에 대하여 그처럼 할말이 많은지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다음은 그 내용을 옮긴 것이다.
▲첫 사람이 남긴 글: 커피가 떨어지면 다음 사람들을 위해 새로 뽑아놉시다.
▲그에 대한 이견: 어떤 이들은 새로 내린 커피를 좋아합니다. 그보다 커피를 기다리면서 가볍게 스트레칭이라도 하는 여유가 좋지 않을까요.
▲세 번째 글: 커피를 내리는 도중 절대로 중간에 따라가지 맙시다. 중간에 한컵을 따라가면 커피 전체의 맛의 배합이 달라집니다. 적발시에는 단호한 조처가 뒤따를 것입니다. (이 글은 내가 몰래 쓴 것인데 그것을 본 모든 사람들이 다 내가 쓴 줄 알았다고 한다. 그동안 나한테 들켜서 야단 맞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네번째 사람: 내가 쓴 ‘단호한 조처’ 밑에 줄을 치고 (감봉?)이라고 주를 달았다.
▲또 다른 이견: 저는 하루 지난 커피도 마십니다.(이 글에 대해서는 모두들 ‘엽기’라며 누군지 적발하자고 화를 내었다)
▲그 다음 사람: I do not drink coffee. So I don’t care!!! (이 글에는 다른 사람이 ‘egoist’ 라고 토를 달았다)
여기서 게시판이 차고 넘치자 누군가 그 밑에 큼직한 종이를 붙인 후 맨 위에 “더 쓰고 싶으면 마음껏 쓰시요” 라고 써넣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쓰시요’의 ‘요’ 자에 동그라미를 치고는 ‘맞춤법 틀림’이라고 교정을 보았고, 또 누군가 “맞춤법이 뭐가 틀려? 무식하긴”이라는 글을 남겼으며, 이에 대해 교정을 본 사람은 “요는 연결형 어미. 산이요, 들이요… 오는 종결형 어미. 더 이상 낙서하지 마시오. 끝”이라고 끝을 보았다.
한편 새로 붙인 종이에 오른 글은 다음과 같다.
▲첫 사람: 지금 커피도 맛이 좋지만 다른 걸로 한번 바꿔보면 어떨까요?(우리 회사는 Coffee Bean & Tea Leaf 회사의 헤이즐넛을 몇 년째 마시고 있다)
▲두번째: 맛있는 커피 공급을 위해 애쓰는 송과장님(편집국 서무)의 노력에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이런 답글을 가리켜 동문서답이라 하겠다)
▲세번째: 커피를 많이 마십시다. 커피가 담석은 물론 당 조절, 나아가 심장 건강에까지 좋다는 사실들이 과학적으로 속속 밝혀지고 있습니다. 커피를 ‘경원’시하는 사우들이여. 좀더 애정을 가집시다.
▲여기에 누군가 (치매예방에 효과있음) 이라는 글을 붙였고, 또 누군가 ‘치매예방’에 밑줄을 친 다음 ‘여기 해당되는 기자들은 누구?’라는 물음표를 달았다.
커피에 대한 의견은 여기에서 끝이 났다. 하지만 격무에 시달리던 기자들은 이 작은 재미가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었는지 다들 지나다니며 열심히 게시판을 훔쳐보고 있었고, 그 옆에 또다시 흰색 대자보가 붙었는데 여기서는 화제가 한국 드라마와 비디오 이야기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공개하지 않는 편이 좋으리라 생각한다.
이번 주 주방일기를 대신 써준 사우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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