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할아버지 할머니 자경단

2004-06-2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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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소유주들의 골칫거리인 터마이트가 나무를 갉아먹는 이유는 그저 ‘기호식품 1호’여서가 아니다. 자신보다는 뱃속에 서식하는 원생동물의 입맛을 따를 뿐이다. 이 원생동물은 나무의 주성분인 셀룰로오스를 먹고사는데 이 셀룰로오스를 분해에 터마이트에 영양을 공급한다. 또 원생동물의 배설물은 터마이트 유충의 생필품이다. 빈틈없이 짜여진 생존의 공동체이다.
헌데 단단해 보이는 터마이트 공동체는 개미의 밥이다. ‘정찰병’ 개미가 터마이트 진지를 둘러본 뒤 동료들을 데리고 진격하면 ‘병정 터마이트’가 지키고 있어도 소용없다. 2억여년 전부터 지구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종류만도 2,000개에 달하는 터마이트 공동체는 인정사정 없는 개미들에게 무너지고 만다.
메디케어, 메디칼에 얼기설기 엮어져 있는 한인사회의 ‘의료 비리 공동체’도 한두 해가 아닌 오랜 세월을 이어내려 왔고, 그 형태도 “그런 방법도 있구나” 할 정도로 기발하고 다양하다. 의료기관, 브로커, 메디케어 수혜자 등이 공생 관계를 견고하게 구축해 놓았다. 그래서 비리가 수면 위로 떠오를 때마다 한인사회가 목 아프게 요구한 “준법”에 코웃음을 쳤다.
그러다 연방수사국의 집중수사 착수에 소스라치고 있다. 지난해 전국적으로 3,275개 의료기관이 비리 적발로 메디케어와 메디칼을 더 이상 취급하지 못하게 됐다. 이 가운데 577곳은 형사처벌을, 243곳은 민사소송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주인 없는 돈’이라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빼먹은 대가이다.
이번 수사로 메디케어, 메디칼 부패 고리가 싹둑 잘리면 타운경기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올 정도로 부정이 만연돼 있는데도 의료기관과 브로커의 자체정화는 기대난망이다. 그러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조금만 협조하면 의료 비리를 근절할 수 있다.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남다르다. 고생이 몸에 뱄다. 자녀의 이민생활에 조금이라도 부담이 되지 않으려 무진 애를 쓴다. 그러다 보니 의료기관과 브로커들이 노인 환자를 끌기 위해 제공하는 선물공세에 쉽게 무너진다. 위법 행위를 알면서도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모른 채 한다. “한인사회 병원의 수입이 늘면 타운경기에도 유익할 것”이라며 비리를 비호하기도 한다.
하지만 룰을 어기면서 챙기려는 구습은 벗어날 때가 됐다. 올림픽 100미터 결승전에서 아무리 빨리 골인해도 제 궤도를 벗어나면 실격이다. 아메리칸 드림의 중요한 부분은 이 사회에서 자유와 책임을 체득하고 생활화하는 것이다.
엉터리 의료비 청구서를 받고 괘씸해하면서도 “동포끼리 어떻게…”하며 신고를 꺼리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의료 비리로 새나가는 돈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아들, 딸이 힘겹게 벌어 정부에 낸 혈세이다. ‘공돈’이 아니라 정말 소중히 쓰여야 할 돈이다.
메디케어가 2019년엔 지급불능 사태를 맞을 것이란 정부보고서를 믿지 않는다면 몰라도, 지금처럼 펑펑 쓰다간 기금이 고갈돼 할아버지 할머니의 아들, 딸, 손자, 손녀들이 아파도 치료받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을 헤아려야한다.
한인사회가 수사의 표적이 됐다고 해서 ‘표적수사’ ‘소수계 차별’ 운운할 게 아니다. 우리끼리 감싸고 돌 일이 아니다. 고름은 아무리 쓰라려도 말끔히 짜내야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 일을 맡아야 한다. 그 동안 의료 비리에 편승했던 양심의 가책을 털어 버리기 위해서라도 그렇다.
노인학교에서, 다방에서, 노인회관에서, 공원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비리 의료기관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신고해야 한다. 너무 야박하다 싶으면 1차 경고 이후 시정이 안 될 경우 신고할 수도 있다. 영어로 된 의료 청구서를 해득하기 어려우면 자녀에게 보여 부당한 부분을 잡아내야 한다.
의료비리 없는 진짜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야겠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메디케어, 메디칼 부정을 고발하고 신고하는 ‘의료 비리 자경단’이 돼야 한다. 아들 딸, 손자 손녀의 롤 모델이 될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이다.

박 봉 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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