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한국 자금 탈출 러시 파장

2004-06-19 (토)
크게 작게
LA등 미주 한인커뮤니티가 최대 수혜자

한국 사회 분위기가 부동자금 유출 조장
단속 강화할 경우 타운경기 악화 가능성

한국 돈이 미주 한인타운으로 몰려들고 있다. 지난 수년간 가속화되고 있는 한국 돈 유입은 한인타운의 비즈니스와 부동산 값을 급등케 하는 등 한인 경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금 이동의 파장과 향후 전망을 진단해본다.


지난 달 한국에서는 4,300억 원대의 사상 최대 환치기 조직이 적발됐다. 이번 사건은 계좌 이용자가 4만7,8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말이 그렇지 이 조직 하나를 통해 5만 명에 가까운 한국인들이 불법으로 외화를 유출했다는 것은 한국 자금의 탈출 러시가 어느 정도 심각한 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환치기 조직이 얼마나 있는 지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이번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외환 거래가 자유화 돼 신고만 하면 합법적으로 돈을 보낼 수 있는 데도 환치기를 이용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기록이 남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불법으로 해외에 돈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올 들어 은행을 통해 합법적으로 외국으로 송금한 액수는 4월 말 현재 5조원(약 40억 달러)에 달한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 이상 늘어난 것이다. 이 기간 중 해외 이민자 수는 2,600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3,500명에 비해 35%나 감소했는데도 송금액은 증가하고 있다.
한국에 있는 돈을 외국으로 빼내려는 사람은 한국 거주자뿐만이 아니다. 한국에 남겨놓은 재산을 처분해 가져오는 해외 한인들 숫자도 급속히 늘고 있다. 공식적으로 집계된 해외 교포 재산 반출액은 2000년 6,970만 달러에서 2001년 2억 5,300만 달러, 2002년 5억 4,100만, 2003년 9억 5,480만 달러로 급증세를 보이고 있다.
해외로 빠져나간 돈이 가는 곳은 미국, 중국, 일본, 유럽, 호주 등 다양하다. 도쿄와 베이징, 시드니 등 세계 각지에서 한국인 이름으로 부동산 소유권이 바뀌는 일이 이제는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 여러 나라 중 미국, 그 중에서도 한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LA 한인타운이 가장 큰 수혜자라는데 많은 전문가들은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 수년 간 매상이 엄청나게 뛴 것도 아닌데 코리아타운 일대의 비즈니스들은 가격이 2배 이상 폭등했으며 한인타운 집 값도 비슷한 조건의 타 커뮤니티에 비해 30% 이상 과대 평가돼 있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한국 돈의 유입이라는 데 별 이론이 없다. 영어에 서툰 한국인들이 투자 대상이나 거주지로 한인 커뮤니티를 선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LA 최대 한인 은행인 한미를 통해서만 작년 5,000만 달러가 넘는 돈이 들어 왔으니 10개에 달하는 한인 은행을 모두 합치면 1억 달러는 쉽게 넘으리라는 추산이 가능하다. 한인 중 한인 은행을 이용하는 비율이 절반에 불과하고 정작 큰돈은 미국 은행을 통해 유입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줄잡아 매년 수 억 달러가 LA로 흘러 들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해외로 빠지는 돈 가운데는 유학이나 생활비 등 실제 필요에 따른 것도 있지만 국내 정세의 불안과 만약의 경우에 대비한 도피성 자금도 많다. 최근 한국 분위기는 주한미군 철수와 경기 악화, 부유세 도입과 재산권 제한 움직임 등의 영향으로 부유층은 물론 중상류 층에서도 어떻게 든 재산의 일부를 해외에 옮겨놓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당장 외국에 송금은 하지 않더라도 기회만 있으면 원화를 달러로 바꿔 외화 예금 통장에 넣어 두고 있다. 한국은행이 집계한 한국 거주자 외화예금 잔액은 4월 현재 191억 달러로 사상 최고치다. 여차 하면 빠져나갈 돈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해외 투자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한국에서는 해외 투자를 전문으로 해주는 투자 대행업체들이 등장, 성업중이다. 이중 잘 나가는 곳은 올 들어 계약고가 전년에 비해 50~100%까지 늘어났다. 한국에서 조그마한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A씨는 이미 수년 전 보스턴에 콘도를 한 채 사뒀고 시카고에는 작은 상가를 사 렌트를 주고 있다. 일부 국내인들은 미국에 사는 한인들보다 더 요즘 어느 지역이 경기가 좋고 앞으로 전망이 어떻다는 데 대해 자세한 정보를 갖고 있다.
이처럼 자금의 해외 탈출이 러시를 이루자 금융 감독원과 국세청 등 관계 당국은 불법으로 해외로 빠져나가는 자금을 파악하기 위해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금감원은 은행들로부터 연간 해외 송금 규모가 10만 달러 이상인 고객들의 명단과 송금액, 송금 지역 등에 관한 자료를 넘겨받아 검토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런 조사가 얼마나 실효를 거둘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외국환 거래법 상 국내에 거주하는 개인들이 외국에서 부동산이나 골프장 회원권을 취득하려면 한국은행에 신고해야 한다. 수많은 한국 거주자가 외국 부동산을 사고 있지만 신고 사례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단속이 강화될 경우 송금 심리를 위축시켜 당분간 송금액 줄어들고 그렇게 될 경우 자금 수입의 수혜자였던 미주 한인 경기는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민수봉 윌셔 은행장은 “지난 수년 간 LA 코리아타운은 한국 돈의 유입으로 부동산이나 비즈니스가 과대 평가돼 왔다”며 “한국 돈이 발길을 돌리면 20% 정도 가치 하락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지난 수년간 LA 한인 사회는 전반적인 불경기에도 불구, 주류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다운타운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호경기를 누려왔다. 그 가장 큰 원인이 한국 정부와 사회의 파퓰리즘과 반기업 정서 때문이라는 점은 역설적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자녀 교육과 취업 불안 등의 이유로 국민 10명 중 7명이 기회만 있으면 이민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거기다 현 집권층과 사회 분위기가 반 기업, 반 부유층으로 흐르면서 돈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재산을 국내에만 놔둘 수 없다는 생각이 만연돼 있다. 한국 집권층과 사회 분위기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미주 한인 사회의 ‘좋은 시절’은 당분간 계속될 모양이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