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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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의 진짜 공적

2004-06-10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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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레이건에 대한 온갖 찬사에도 불구, 그의 최대의 공적 중의 하나가 간과되고 있다. 그는 두 자리 숫자의 인플레이션의 고삐를 잡음으로써 1980년대와 1990년대의 경제적 번창의 무대를 마련했다. 고 인플레가 레이건에게 권력을 안겨 줬다면 저 인플레는 대통령으로서 그의 인기와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미국민들이 인플레이션 때문에 얼마나 겁에 질렸었는지를 우리는 지금 잊고 있다. 1979년 한 오피니언 리더에 의하면 당시 대중들에게 인플레이션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인플레이션에 버금가는 것을 꼽자면 1950년대 초 냉전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베트남 전쟁 마지막 시기 정도였다.
국민들을 힘 빠지게 한 것은 단순히 높은 인플레이션(1979년 13.3%)이 아니라 아무도 멈출 수 없을 만큼 예측 불가능하게 치솟는(1976년에는 4.9%) 것이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일련의 정책들을 도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당시 이란 인질사태도 중대했지만 정치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인플레이션이었다. 선거 전 마지막 월례 보고서에서 소비자 물가 지수는 1%가 올라갔다. 물가는 1년 전에 비해 12.7% 올랐다. 1979년 9월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67%는 인플레이션의 고삐를 잡는 것이 일자리를 찾는 것(21%)보다 더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선거 당일 레이건 지지자의 59%는 인플레이션이 선택의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말했다.
레이건이 “4년 전에 비해 잘 살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가 말 한 것은 인플레이션이었다. 1976년이래 일자리는 1,060만개가 창출되었다. 1980년 실업률(7.1%)은 1979년(5.8%)에 비해 뛰어올랐지만 1976년(7.7%)보다는 낮았다. 그러나 국민들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불확실성을 혐오했다. 자신이 받는 봉급과 저금해 둔 돈이 미친 듯이 날뛰는 물가와 보조를 맞출 수 있을 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자율은 천문학적 수준이었다. 1980년 30년 고정 모기지 이자는 평균 12.7%였다. 이런 것들이 국가 지도자들과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잃게 했다.
1982년이 되자 인플레이션은 3.8%로 떨어졌다. 연별 단위로 이후 6.1%(1990년)를 넘어서 본적이 없다. 두자리 숫자의 인플레이션을 누르고 나자 경제가 갑자기 활황세를 타다가 다음 순간 곤두박질 치기를 반복하는 패턴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질서와 예측이 회복되었다. 그러자 정부의 업무 수행능력이 회복된 것처럼 보였다.
민주당과 공화당을 통틀어 어떤 지도자도 레이건 처럼 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인플레이션의 파괴력이 얼마나 심대한 지를 레이건 만큼 본능적으로 알아챈 정치인은 없었다.

로버트 새무얼슨/워싱턴 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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