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레이건

2004-06-08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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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기울이던 대통령

낸시 레이건 여사에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서거에 대한 애도의 편지를 방금 보냈다.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인 레이건은 긴 삶의 여정 속에서 승리의 순간을 맛보고, 부침을 겪어내고, 진정한 사랑의 행복을 경험한 비상한 인물이었다.
대통령으로서 첫 임기동안 로널드 레이건은 미국의 자부심을 회복하는 데 전념했다. 그는 미국의 전통과 낙관주의에 호소하고 아메리칸 드림에 호소했으며 미국의 경제와 군사력 증강을 그의 주 업무로 파악했다. 그것은 소련에 대한 적대적 수사와 행동으로 동반되면서 양국 및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자아냈다. 당시 레이건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그의 반공사상과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간주하는 매파로서의 평판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두 번째 임기로 들어서면서 그는 일련의 다른 목표들을 강조했다. 역사상 존경받는 인물은 평화를 만들어낸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가 알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경험과 직관, 삶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한 그의 확신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의 이런 태도를 지지한 것은 그의 아내이자 친구인 낸시였다.
내가 새롭게 변화하는 소련을 대표하던 1985년 우리는 제네바에서 첫 회담을 가졌다. 소련의 새 지도부는 과거와 같은 길로 나갔었을 수도 있었지만 다른 길을 택했다. 우리나라의 중대한 문제를 보게 되었고 핵 경쟁이 인류를 몰아넣은 미궁의 벼랑 끝에서 어서 빨리 물러서야겠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레이건 대통령과 처음 대화를 시작하는 것은 어려웠다.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서, 특히 군축과 안보에 관한 이슈에서는 불신과 수많은 문제들이 가로막는 장애물들, 그리고 편견을 극복해야만 했다.
만약 그때 미국 행정부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우리가 합의에 도달하고 합의사항들을 시행에 옮기는 일들이 가능했는지 나는 확신이 없다. 레이건은 우파였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독단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타협과 협동을 모색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미국민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의 끈질긴 대화 노력은 결국 그 결과로 정당성이 입증되었다. 1987년 백악관에서 우리는 중거리 핵무기 협정을 조인했고, 그것이 무기 감축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같이 중대한 임무들을 다루면서 우리는 미소 양국의 관계의 성격을 바꾸었고 상호 신뢰를 구축해 나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바뀌었고 우리의 견해도 바뀌었다. 레이건 대통령이 1988년 여름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기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그가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의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고 믿는다. 그 시대가 준 가장 중요한 교훈은 대화의 필요성이라고 본다. 수년에 걸쳐 로널드 레이건과 만나면서 내가 본 바로 그는 새 세대 정치 지도자들에게 우리가 남겨줄 유산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해를 거듭하면서 우리 사이에 형성된 개인적 친밀감으로 나는 인간 로널드 레이건의 특성을 존중하게 되었다. 진정한 지도자이자 말에 대한 책임을 지는 사람, 그리고 낙관주의자로서 그는 품위 있게 삶의 여정을 살았고 말년의 삶을 어둡게 했던 잔인한 질병과 용감하게 맞섰다. 그는 역사와 사람들의 마음속에 길이 남을 것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뉴욕타임스 기고.



매파 길들인 보수주의자

로널드 레이건이 1960년대 중반 캘리포니아 정계에서 부각하기 전까지 보수주의 운동은 공산주주의 운운하는 오렌지카운티와 샌개브리엘 밸리의 비효율적이고 부정적인 우파들의 결집 정도로 인식됐었다.
레이건은 이들에게 바른 태도를 가르쳤다. 그런 과정에 레이건은 이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다는 점을 진작시켰다.
그는 강렬한 애국심을 서로 나눴다. 경제적 사회적 보수주의와 반공주의를 견지했다. 그러나 레이건은 우호적이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이러한 자신의 소신을 지켰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적 움직임이 성공하려면 포용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레이건이 이해했다는 것이다. 그저 고집스런 우파 철학만으로는 공화당 내 온건파를 철썩 같은 지지자로 만들기 어려우며 지나친 민권 운동과 학생 데모에 신물을 느낀 민주당 내 온건파들에게 어필할 수 없다는 것을 레이건을 잘 알고 있었다.
호감 주는 성격, 매료시키는 언변, 정치적 수완 등이 어우러져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공화당을 포함해 미 전국의 공화당원들을 뭉치게 했다. 공화당원뿐 아니라 민주당이 강세를 보이는 중서부와 동부 지역에서도 주도권을 장악했다.
1964년 배리 골드워터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지원 연설을 하던 레이건은 1967년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됐다.
레이건은 이념적 우파들이 그 동안 갖지 못한 다양한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당연히 공화당의 지지뿐 아니라 다양한 이념과 계층의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일례로 1969년 미신문노조가 AP를 상대로 파업에 돌입했었다. 나는 당시 새크라멘토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 당시 레이건 주지사는 우리들의 파업을 이해했다. 그래서 우리는 AP사무실 앞에서 며칠간 파업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공화당이었지만 영화배우노조위원장을 지냈기 때문에 노조의 파업을 이해해주었다. 물론 레이건이 친 노조라는 것은 아니다. 그는 대통령 시절 공항 관제탑 노조 1만1,000천명을 해고했었다. 하지만 레이건은 개인적으로 노동자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을 나는 갖고 있다.
1978년 대통령 출마 시 캘리포니아에서 동성애자가 교사가 되지 못하게 하는 법안이 상정됐었다. 공화당 골수들이 마련한 법안에 대해 레이건은 여론을 경청 한 뒤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공화당 내 지지가 떨어질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소신을 따랐다. 결국 이 법안은 찬성 42%로 부결됐다.
레이건은 보수주의자이지만 동시에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정치를 이념뿐 아니라 사람과 관계로서 파악하고 있었다. 레이건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2000년 대선 때처럼 국론이 반반으로 갈리는 분열상황을 보이지 않았다. 1980년, 1984년 각각 카터와 먼데일이 고배를 마셨고 민주당이 슬픔에 빠졌었지만 지금처럼 미국을 비난받는 나라로 만들지는 않았다.

빌 보야르스키/LA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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