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의 장모님

2004-05-27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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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나는 장모님 생각을 자주 한다. 지금 여든이 넘으신 장모님은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후 십 이년 동안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중환자 생활을 하고 계신다. 몇 주일 전 오리건에서 장모님을 모시고 있는 처제가 장모님이 돌아가실 것만 같다는 비상전화를 하였다.
장모님을 만나 뵙기 전부터 그분의 영향은 나에게 컸다. 결혼하기 전에 아내로부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여섯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하여 고생하시는 이야기, 자녀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시는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아내의 어머니를 만나보기 전부터 존경하게되었다.
우리들 사이가 결혼을 고려할 만큼 진지하게 되었을 때 아내의 어머니를 만날 날이 내게 다가왔다. 지금도 나는 그날에 있었던 대화를 생생하게 기억하고있다. 매섭게 추웠던 저녁 서울 변두리 어느 다방에서 나는 장모님을 처음 만났다. 장모님이 다방에 발을 들어놓는 순간부터 나는 그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아내의 통역으로 우리들은 대화를 나누었다. 아니 대화라기보다는 면접시험이었다. 그분의 첫 번째 질문은 “크리스천이냐?” 이었다. 나는 “예’하고 확실하게 대답하였다. 다음 질문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 이었다. 나는 “당신의 딸을 위하여 좋은 남편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현명한 답이었지만 옳은 답은 아니었기에 나는 그분의 반응을 깊이 살폈다.
나의 답변이 통역된 후 딸과 어머니는 조용하게 한참동안 이야기하였다.그분은 나의 대답이 자신이 가장 듣고 싶은 현명한 대답이라고 하시며 웃었다. 그 순간 나는 그분이 나의 장모님이 될 것을 알았다. 딸이 외국인과 결혼하여 멀리 떠나는 사실을 근심하며 슬퍼하는 장모님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다. 이승만 박사도 외국인과 결혼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한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지 않았느냐 하며 어머니를 위로하였다.
그 후 몇 년이 지났다. 첫아이가 태어났을 때 나는 한국에 계시는 장모님에게 전보를 쳤다. 5 파운드 된 손자가 태어났다고 소식을 보냈다. 장모님은 5 킬로그램으로 생각하고 손자가 무척 크게 태어났다고 생각하였다한다. 사실은 2 킬로 조금 넘은 작은아이로 태어났는데 말이다.
얼마 후에 장모님은 손자들을 돌보기 위하여 미국에 오셨다. 우리들과 함께 살았던 장모님은 나의 이름 ‘크리스’를 발음하지 못하시어 ‘그리스 (grease)’ 라고 부르곤 하였다. 나를 ‘기름기’라고 부르셨지만 나는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몇 년 후에 장모님은 다른 주로 이사를 가셨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 모르게 돈을 손에 쥐어주는 할머니의 연례 방문을 손꼽아 기다리곤 하였다. 아이들에게 돈을 주지 말라고 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한번은 할머니 집을 방문한 아이들에게 신발 속에 돈을 넣어 주셨다. 신발을 신으려다가 돈 20달러를 신발 속에서 발견한 아이들은 눈물까지 흘리며 좋아서 깡충깡충 뛰었다.
장모님은 손자들에게 향한 자신의 사랑을 말로 마음껏 표현하시지 못하시는 것을 늘 답답해 하셨다. 자신이 만들어준 만두를 아이들이 잘먹는다는 것을 아시게 된 후, 장모님은 우리 집에 방문하실 때면 제일 먼저 체크하시는 것이 냉동기이었다. 냉동기를 열어보시고는 식품점에 가자고 아내를 독촉하셨다. 만두 재료를 사와서 수천 개의 만두를 만들어 손자들이 일년 먹을 만두를 냉동기 가득 채워놓으시고 가셨다. 눈을 감고도 완전한 만두를 만드시는 할머니를 아이들은 신기해하였다. 만두를 만드는 할머니를 보면서 작은아이가 “우리할머니는 만두기계이다”라고 큰 아이에게 말하는 것을 엿듣고 우리부부는 웃은 적이 있다. 만약에 할머니의 사랑을 맛으로 비유한다면 만두 맛이 아닐까싶다.

크리스 포오먼<교육학 박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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