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비시민권자의 투표권

2004-05-18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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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자신이 살고자 하는 나라가 잘 되길 바란다. 그리고 누구든 자신의 나라를 잘 보전하는 데 동참할 자연권을 갖는다.” 미국 개국공신 중 한 명인 토마스 제퍼슨이 1776년 이러한 주장을 펴면서, 시민권자가 되길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민자가 민주주의 건설에 함께 하도록 독려할 것을 촉구했다.
미국 역사가 시작되는 177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약 150년 간 22개의 주 및 연방정부 관할지역에서 비시민권자도 연방, 주, 지역 선거에 투표할 수 있었다. 또 시의원, 검시관, 교육위원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까지 불어닥친 반 이민 정서로 인해 비시민권자의 투표권이 소실되고 말았다.
문맹 시험, 투표세 등 여러 가지 제약조건을 내건 동시에 밀물처럼 들어오는 이민자의 영향력을 우려해 투표 참여를 막았다. 이러한 조치들로 인해 1924년 투표율은 49%로 1900년 이전의 약 80%와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지속적인 민권운동의 덕으로 문맹 시험, 투표세가 폐지되고 1971년 투표연령이 18세로 낮아졌지만 이민자에 대한 차별은 여전했다.
특히 아시안에 대해 연방정부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중국인 이민자가 시민권을 취득하게 된 것이 1943년이다. 인도출신에겐 1946년 처음 시민권 취득이 허용됐다. 일본인과 다른 아시안에게는 1952년에야 기회가 주어졌다. 굴을 너무 많이 딴 ‘전과’를 문제 삼아 시비를 걸고, 합법 이민자의 윤리의식을 들먹이며 시민권을 선뜻 내주지 않는 것을 보면 이민자에 대한 문턱은 여전히 높다.
미국에는 1,200만 명의 영주권자가 있다. 이들이 세금을 내고 자녀를 학교에 보내고 있으며 군복무를 하고 이 나라를 지키다 피를 흘리기도 한다. 이들 합법 이민자가 내는 세금을 합하면 엄청나다. 이들의 납세가 없다면 정부가 살림살이를 꾸려가기 어려울 지경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이 내는 세금을 정부가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커뮤니티 지도자들이 펼치는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들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는 완전히 소외돼 있다. 합법 이민자에게 제한적이나마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은 이들의 사회적 기여에 대한 마땅한 보상이다.
합법 이민자라도 시민권을 취득하려면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 이 긴 시간은 투표권을 통해 새 사회에 참여하고자 하는 이들에겐 여간 답답한 게 아니다. 또한 시민권을 제 때 취득하지 못한 이민자의 자녀들은 부모 세대가 투표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성장한다. 투표할 나이가 되어도 선거에 냉담하게 되고 참여민주주의에 시큰둥할 수 있다. 사실 미국의 각종 선거에서 나타나는 저조한 투표율은 투표권을 시민권자에 한정하는 정책에 일정 부분 기인한다.
유럽에서는 20여 국가가 수십 년 전부터 비시민권자에게 커뮤니티 선거 투표권을 주고 있다. 미국에서는 1990년대 매릴랜드와 매사추세츠의 일부 커뮤니티에서 비시민권자가 지역 선거에서 투표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뉴욕, 워싱턴DC, 덴버, 코넥티컷, 샌프란시스코에 합법 이민자에게 지역 선거 투표권을 허용하자는 캠페인이 전개되고 있다. LA에서도 유사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한인 등 아시안 커뮤니티 지도자들이 네트웍을 형성해 캠페인을 추진할 태세이다.
영주권자가 투표권을 갖게 된다면 굳이 시민권을 따 제대로 된 미국시민이 되려고 하겠느냐는 우려가 있다. 하지만 영주권자는 주 및 연방차원의 선거에 참여할 수 없고 미국 여권을 지닐 수 없다. 또 성가신 측면이 있긴 하지만 시민으로서의 자긍심을 배태하는 배심원에 끼일 수도 없다. 지역선거에 대한 투표권 부여가 시민권 취득 동기를 약화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합법 이민자에게 지역선거에 한하여 투표권을 인정하는 것은 헌법의 평등조항에도 위배되지 않는 법적이고 도덕적이며 실질적인 조치이다. 합법 이민자에게 ‘제한적 투표권’을 주는 것은 이들이 향후 시민권자가 됐을 때 책무를 다하는 ‘준비된 시민’으로 만드는 길이다.

박 봉 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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