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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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근금지 명령과 가정폭력

2004-02-2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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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홍 변호사


나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어요. 제니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처음 와 본 법정의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에 압도된 듯 그녀는 다리를 떨고 있었다. 그녀는 전날 밤 약혼자에게 맞아 눈은 멍들었고 코뼈가 부러진 상태였다. 그녀는 보호관찰관, 피고들과 경찰이 서있는 통로로 빠져나와 내게 조용히 말했다. 접근금지 명령(Restraining Order)을 신청할래요. 접근금지 명령 양식은 보통 몇 장으로 돼 있는데 이름, 전화번호 등 개인정보 뿐 아니라 박스에 체크하는 것과 약혼자가 그녀의 주거지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 집이나 직장에 연락하지 못하게 하는 것 등에 ‘예’라고 답하는 것 등 상세히 의견을 표시한다. 그런데 제일 힘든 과정은 그 전날 밤의 일을 상세히 설명(reason)하는 부분이다. 그녀는 말을 하다말고 넷째 손가락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약혼반지를 보이며 그이한테 받은 선물이에요. 그런데 이 선물도 함께 받았네요 하며 멍든 눈을 가리켰다.
그리고 전날 밤 얘기를 시작했다. 우리가 좋아하는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어요. 그러다 그의 직장에서의 문제를 얘기했고 그는 맥주를 좀 많이 마셨지요. 그리고 저는 그에게 운전을 해주겠다고 제의를 했는데 그때부터 그는 흥분하기 시작했고 고함을 질렀어요.
그런데 다른 땐 소리만 질렀었는데 그 날 저녁은 욕설을 퍼부었다고 했다. 집에 와서 급기야 주먹을 휘둘렀다고 하면서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을 무척 불편해 했다.
제니의 케이스는 순조롭게 진행됐고 더 이상의 법적 문제로 불거지지 않았지만 보통은 접근금지 신청을 하고 더 복잡해지는 경우가 있다(격한 감정이 폭발한 상대편이 이 신청을 무시하고 피해자를 쫓아다니기 때문에). 한편 피해자도 심리적 도전을 많이 받는 시기이다. 일단 접근금지 명령을 받고 다시 그 기간을 연장 받아야 하는데 그때 연장을 하지 않으면 시효가 만료된다. 이것은 피해자의 실수라기보다는 피해자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흐지부지해 다시 가정폭력의 사이클을 반복하는 경우라 하겠다.
이 같이 가정폭력은 겉으로 드러난 형사문제보다 그 근본적인 뿌리가 깊다. 부부간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동거인이나 이혼 후 전 배우자로부터 협박과 폭력을 당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이 가정폭력의 연루자는 특정 민족, 사회적 지위, 경제적 풍요 등과는 무관함을 일러두고 싶다. 할리웃 백만장자에서부터, 의사, 변호사, 목사, 심지어는 이것을 단속하는 검사나 경찰의 집에서도 일어난다. 또 가해자가 역설적으론 피해자인 경우도 많아 카운슬링이 절실하다.
그리고 이 문제는 그저 쉬쉬하다가 살인까지 가는 경우도 있고 심리적 충격으로 정신병까지 얻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거시적 안목으로 차근차근 풀어야할 사회적 과제이다.
(714)901-4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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