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4-02-18 (수) 12:00:00
젊은 날의 초상
지난 목요일 나는 뜻밖의 선물을 받고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날 아침 원로 여류화가이신 김순련 선생이 전화를 주셨다. 수줍음을 타시고, 말씨도 모습도 조용조용하신 이 어른은 아주 가끔 전시회장이나 타운 문화행사에서 몇번 뵌 일이 있지만, 그저 인사만 드리곤 했지 길게 만나뵌 적은 없는 분이다. 오랜만에 어쩐 일이신가고 여쭈었더니 내달에 희수전을 여신다고 하셨다. 평소 전시회를 자주 하시는 분도 아니니 77세 기념 희수전이라면 여성면에 좋은 기사가 나올 것 같아 담당기자를 인터뷰하러 보냈다.
오후에 돌아온 하은선 기자가 내게 그림 하나를 쓱 내민다. 김순련 선생 특유의 꿈꾸듯이 부드러운 화필로 그려진 소녀가 새침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작은 초상이었다.
“누군지 아시겠어요?” 영문 몰라하는 나를 보고 하기자가 깔깔 웃으며 하는 말, “부장님이래요” 순간 나는 내 눈과 귀를 의심했다. 무슨 소리야, 이게 나라고? 이 예쁜 소녀가? ^.^*
김순련 선생이 오래전 연극무대에 섰던 나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벌써 16년전의 일이다. 1988년 나는 극단 ‘모임’에서 제작한 연극 ‘우리 읍내’에 출연한 적이 있다. 손튼 와일더 원작의 이 연극에서 나는 에밀리라는 여주인공역을 맡았었다.
사실은 연극의 연자도 모르던 사람이었는데, 문화부 기자로 극단 첫 모임에 취재하러 갔다가 당한 일이었다. 대본을 한번 읽어보라기에 재미삼아 읽었더니 며칠후 여주인공을 맡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 워낙 경험이 없던 관계로 망설였으나 주위의 격려와 신문사의 허락을 받고 몇 달간의 맹연습을 거쳐 이벨극장 무대에 올랐던 것이다.
그 연극의 끝부분은 에밀리의 무대라 해도 좋을 만큼 클라이맥스가 매우 특별한 작품이다. 불이 꺼지고 모든 출연진의 동작이 정지된 가운데 한 줄기 조명 속에서 에밀리가 눈물을 흘리며 열연하는 독백이 꽤 오랫동안 이어진다.
김선생님은 그 장면이 너무도 감격적이었다고 하셨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그 감동이 영 사그라들지 않아 갑자기 일어나 낙서하듯 그리셨다는 것이다.
나의 감격이 어떠했을지 한번 상상해보시기 바란다. 처녀시절 모습이 화가의 손을 통해 그려져 16년후 내 손에 들어온 것이다. 나는 마음이 벅차 오르고 감상적이 되어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뜻밖이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아 두서없이 횡설수설하기도 했다.
그동안 까마득히 잊고 살았었다. 연극에도 출연할 만큼 정열적이었던 젊은 시절, 3일 공연 내내 1천여명 관객이 지켜보는 앞에서 뜨거운 조명을 받으며 열연할 만큼 끼가 넘쳤던 옛 모습이 아득하게 그립기도 하고, 생소하기도 한 추억으로 되살아났다.
그때 막 연애를 시작했던 남편이 밤늦게 끝나던 나의 연습을 매일 목 빠지게 기다리던 일, 연일 어찌나 피곤한 지 낮에 신문사에서 졸다가 선배에게 야단맞던 일,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꽃다발 세례 속에 황홀하면서도 허무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로부터 얼마나 먼 길을 걸어온 것일까. 또 앞으로 나는 얼마나 더 먼 길을, 어떤 길을 향하여 걸어갈 것인가.
선생님께 전화를 드려 감사하다고 했더니, 갑자기 그린 그림이라 정리가 잘 안 된데다, 내가 어때 할지 몰라 그동안 못 전해주셨다고 하시면서 잘 받아줘서 고맙다고 하신다. 3월5일 도산홀에서 열리는 김순련 선생의 희수전 오프닝때 꼭 찾아뵙고 인사 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