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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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왕

2003-12-3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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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회자 칼럼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얼만 전에 한 친구와 크게 다투었답니다. 그는 최후의 만찬에 나오는 인물 중에 가룟 유다를 제일 먼저 그렸는데, 자기와 싸운 친구의 얼굴을 가룟 유다로 그렸습니다.

원수 같은 친구의 얼굴이 유다의 얼굴이 되어 대대에 전해지게 하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려고 하였으나 몇 일을 애써도 좋은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아서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여러 날 뒤 그는 실패의 원인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친구에 대한 증오심이었습니다. 그는 즉시 유다의 얼굴을 지우고 친구를 찾아가 화해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미움을 남겨두고는 진정한 평화를 맛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주님을 모셔들이면 성령이 주시는 용서와 사랑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과의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14세기 유럽의 벨기에 지역에 레이몬드 3세라는 군주가 살았습니다. 그의 동생이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는 형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형은 뚱뚱한 사람이었는데 그 감방의 문은 그의 몸집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도록 작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만약 몸집을 줄여서 그 문으로 나올 수 있으면 자유의 몸이 되게 해준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에 날마다 맛있는 음식들이 공급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형은 음식을 절제할 수 없어서 결국 더 뚱뚱해 지게 되었고 그 좁은 감옥 문을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는 식욕의 포로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평화를 얻기를 원하지만 늘 근심과 걱정이 끊임없습니다. 그것은 욕심 때문에, 그리고 죄 때문에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버리지 못함이 근심과 불안의 원인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그 욕심의 결과로 죄를 짓게 되고, 그 죄로 인한 가책으로 마음에 평화를 잃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그 삶에 모신 자는 세상 욕심에서 자
유로워지며 근심에서 벗어나 감사의 삶이 됩니다.

자신의 죄를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확신을 가진 자는 죄책의 억눌림에서 벗어나 용서받은 기쁨으로 찬양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자신과의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므로 하나님과의 사이에 막힌 담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었던 인간이 하나님에게 징계를 받을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스스로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므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막힌 담을 허셨고, 우리는 하나님께 감히 아버지라 부르며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성경에서 천사들은 예수님의 오심을 노래하면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누가복음2장14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평화의 왕이십니다.

심호섭목사
(아틀란타성약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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