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빵 한쪽과 우유 한 잔으로 마친 아침식사는 설거지도 단출했다. 왜 진작 이렇게 살지 못했나 살짝 후회가 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며느리 말 한마디에 오십여 년 길들여진 식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꿔버린 남편이 더 괘씸했다.
돌이켜보면 결혼해 이십 육 년, 아침마다 더운밥에 국과 찌개를 끓여대느라 늦잠 한 번 편히 자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자신은 밥심으로 살아간다는 남편의 말에 속아 그 긴 세월 미련스레 새벽밥을 지었다. 사실 젓갈까지 갖춘 깔끔한 아침상은 아내로서의 내 자존심이기도 했다.
올해 초 아직 제 밥벌이도 못하는 어린 아들이 결혼을 고집했을 때, 사실이지 우리부부는 억장이 무너졌다. 결국 자식이기는 부모 없어 마지못해 허락을 했지만 톡톡 튀는 신세대 며느리와 한 지붕 밑에 살아야한다는 사실이 여간 심란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막상 내 식구로 받아들이고 나니 어린 새 며느리가 새삼 귀엽기는 했다.
문제는 새신랑인 아들보다 더 행복해하는 남편이었다. 사실 무뚝뚝한 아들 하나만 키우다가 오십 중반에 ‘아버님’ 소리가 간드러지는 젊은 며느리가 예쁜 건 당연했다. 그래도 그렇지 이 영감 며느리 앞에서 흐물대기가 완전히 등뼈 없는 해파리 형국이다.
자신의 회사에서 가깝다는 이유를 들어 굳이 그 애를 자신의 차로 출근시키는 정성도 뭣한데 행여 며늘애가 아침설거지라도 거들세라 서둘러 모시고 나가는 꼴은 번번이 내 심사를 뒤집었다. 직장을 다닌다 해도 겨우 제 부부 용돈 정도나 감당하는 수준이건만 남편은 며느리가 어린 남편 만나 고생한다며 못내 짠해 했다. 그러니 퇴근 후 고운 앞치마 두르고 시어머니가 다 해놓은 음식을 생색내듯 식탁에 늘어놓는 그 아이의 모습이 왜 아니 밉살스러울까.
게다가 식사 후 그 애가 내오는 커피 한 잔에 희열 하는 남편의 얼굴은 또 얼마나 생경한가. 실제로 내가 차린 밥상에, 혹은 과일과 차에 그가 저토록 행복해하던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사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남편은 분명 나이 든 마누라에게서 사라져버린 ‘여성’을 새삼 젊은 며느리에게서 찾고 있는지 몰랐다.
막 설거지를 마칠 때쯤 마침 상희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함께 점심이나 먹자고 했다.
경애도 불러낼까?
아니, 오늘은 그냥 우리끼리 만나자.
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안 좋은 일은 무슨... 오히려 좋은 일이지.
상희와 경애, 그리고 나는 여고시절 이후 줄곧 한 도시에서 함께 비비적거리며 살아왔다. 각자 그만그만한 남편 만나 자식 한 둘씩 낳고 살아가는 모습 또한 서로 엇비슷했다. 때문에 셋은 30여 년 긴 세월 내내 꽤나 죽이 잘 맞는 친구였다.
부부간 주도권 다툼이 주된 화제이던 새색시 시절은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갔다. 곧 아이들 이유식으로 화제가 옮아갔고 곧이어 남편 승진, 아이들 입시로 화제는 점점 무거워졌다. 그런 사이 우리들의 모습도 건조하고, 적당히 전투적인 중년 아낙의 그것으로 서서히 변해갔다.
그래도 우리 셋 중 제일 젊게 사는 건 경애였다. 우리의 적극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눈가 주름살제거수술을 받은 것도, 또 하루도 빼놓지 않고 꼬박꼬박 헬스클럽에 나가는 것도 그녀였다. 그러나 그런 경애도 첫딸을 시집보내던 작년은 꽤나 휘청거렸다.
오늘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어? 일단 사연이나 알고 먹자. 평소 알뜰하기가 그만인 상희가 고급 일식집에서 비싼 점심을 주문하자 부쩍 호기심이 동했다.
나 내년에 할머니 된단다. 며느리가 임신했어.
그래? 그거 축하할 일이네. 그런데 경사 맞은 사람 얼굴이 왜 그래?
그러게 말이야. 기분이 참 묘하네. 솔직히 할머니로 불려지는 삶이 어떤 건지 두려워.
그래, 그렇기도 하겠다. 살아보니 이십대만 변화가 빠른 게 아니더라. 지금 우리 나이도 결코 만만치 않아. 남의 식구 거두어 내 식구 만들기는 왜 또 이리 힘드는지...
얘기는 자연스레 우리집으로 옮겨갔다. 두 사람 다 근래 들어 며느리를 본 형편이라 누구보다도 말이 잘 통했다. 간간이 씁쓸한 미소로 그리고 때로는 자지러지듯 박장대소하던 그녀가 어느 순간 뚫어져라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얘, 너 요새 얼굴 자주 화끈거리지?
말도 마라. 시도 때도 없이 얼굴에 열이 나고 심장이 뚝딱거리는 걸. 어젯밤에는 잠까지 다 설쳤다니까. 이게 다 젊은 며느리만 싸고도는 주책없는 남편 때문이지 뭐.
글쎄, 정말 그럴까? 시큰둥하게 말을 뱉은 상희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내게 내밀었다. 한달 전 함께 샀던 고급 생리용 위생팬티가 상표도 떼지 않은 채 봉지에 담겨있었다.
더 늙기 전에 한 번 써보자고 한참을 망설이다 산 거잖아. 그 비싼 걸 왜 나를 주니.
이제 영영 필요 없게 됐으니까. 잔인하게도 그 달로 문 닫혀버렸다구. 그나저나 너 얼굴 화끈거리는 것 가지고 공연히 남편 탓하지 마라. 전형적인 갱년기 증상이니까.
...
참, 그날 일 기억나니? 우리 둘이 호기를 부리며 각자 팬티 두 장씩을 살 때 경애가 극구 비싸다며 안 사고 버텼던 것 말이야. 꽤 고급이긴 했지만 여태껏 걔가 자기 모양내는데 돈 아끼는 것 봤어? 너는 그때 경애가 왜 그랬다고 생각하니?
찻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로는 두 사람 다 말수가 뜸해졌다. 간간이 세월 빠르다는 얘기만 할 뿐 둘은 죽어라 녹차만 우려냈다.
상희와 헤어진 뒤 문득 입금해야 할 수표가 생각나 근처 은행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11월 3일. 무심코 입금표에 써넣은 날짜가 한순간 푸드득 내 안으로 날아들었다.
‘오, 맙소사!’ 지난달에 있어야 할 달거리가 벌써 열흘을 비켜가고 있었다.
어머, 네 장씩이나... 어머님, 감사해요. 잘 입을게요. 그 순간 하필 며느리의 생글생글한 미소가 떠오를 게 뭐람. 문득 집까지 가는 길이 한없이 까마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