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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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

2003-12-0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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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서 가까이서-정태수 기자

박찬호(텍사스 레인저스)는 ‘움직이는 기업’이다. 부상으로 2년 내리 이름값을 못해 보너스는커녕 눈총만 받는 처지지만 순수 연봉이 1,300만달러다. 김병현(보스턴 레드삭스)도 어지간한 중소기업 못지않은 돈덩어리다. 올해 연봉으로 325만달러를 받은 그는 자유계약선수(FA)여서 잘만 하면 대박계약을 터뜨릴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시작은 미약했다. 박찬호의 첫 몸값은 10만달러에 불과했고 김병현 역시 거의 공짜나 다름없었다. 돈만 적은 게 아니었다. 박찬호는 말이 메이저리그 직행이지 실은 2년 가까이 마이너리그에서 수련해야 했고 김병현도 ‘첫 임지’는 마이너 마운드였다.

이승엽 때문에 꺼낸 얘기다. 메이저리그 진출을 별러온 이승엽이 크게 흔들리는 모양이다. 메이저리그에 대한 정나미까지 떨어진 듯하다. 지난 30일 일본행을 앞두고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12월까지는 기다려보겠지만 메이저리그 진출이 좌절된다면 삼성에 남겠다. (메이저리그에 안간다면) 국내에 남을 확률 70%, 일본에 갈 확률이 30%다.

지난달 하순 미국방문 이전까지 기회가 닿을 때마다 돈을 적게 받더라도 반드시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겠다고 공언했고 심한 경우 야구를 접더라도 (한국) 잔류는 없다고 못박았던 데 비해 달라져도 한참 달라졌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아무래도 좋다. 뽑든지 말든지 구단의 선택이라면 오든지 말든지 선택은 전적으로 그의 몫이다.

메이저리그의 기대이하 홀대에 그의 자존심이 상했다는 것도 짐작이 간다. 보도에 의하면 명색 아시아 홈런왕인 그에게 시애틀 매리너스가 내민 연봉이 45만달러에 불과했고 어서 오라 손짓하는 듯했던 LA 다저스마저 100만달러(혹은 그 이하)를 제시하면서 이승엽은 주전요원이 아니라 보험용이라는 등 자존심상하는 말들을 흘렸다니 그의 마음이 끊게도 생겼다.

그러나 이승엽이 이날 회견에서 메이저리그가 한국야구 수준을 더블A 정도로 취급한다면 미국에 가지 않겠다고 내뱉은 말은 좀더 냉정한 ‘검색’이 필요하다. 물론 이는 얼핏 듣기에 한국 남아의 배짱과 자부심이 듬뿍 묻어나는 것 같아 시원하고 화끈하다. 하지만 앞서간 주자들의 ML행 비화를 훤히 꿰고 있을 이승엽의 발언치고는 어딘지 옹색하다.

심하게 말해 매리너스와 다저스의 ‘국민타자 홀대설’이 나왔을 때 일본x이 주인인 매리너스가 일본야구의 대기록(한시즌 최다홈런)을 깬 이승엽을 일부러 엿먹었다 다저스가, 메이저리그가 한국야구를 우습게 여긴다고 거품을 물었던 일부 열혈팬들의 감정을 더욱 휘젓는 위험한 발언이기도 하다.

적어도 몸값 홀대 주장은 현실과 꽤 거리가 멀다. 신인으로 ML 무대를 밟은 박찬호 김병현은 그렇다치고 이승엽처럼 ‘다 익은 다음에’ 태평양을 건넌 일본출신 몇명을 보자. J리그 7연속 타격왕 이치로 스즈키는 2001년 시애틀 매리너스에 입단하면서 3년 900만달러의 연봉을 보장받았다. 여기다 계약금 500만달러를 합쳐 계산한 그의 연평균 수입은 약460여만달러로 원 소속팀 오릭스가 제시한 연봉(550만달러)보다 100만달러 가까이 부족하다.

지난해 뉴욕 양키스 유니폼을 입은 히데키 마쓰이는 3년 2,100만달러 계약서에 사인했지만 그 또한 전 소속팀 요미우리가 내민 4년 3,200만달러 계약서에 비하면 연평균 100만달러 손해를 감수하고 있다. 한신구단의 100만달러 다년계약 제의을 뿌리친 쓰요시 신조가 뉴욕 메츠에서 받은 계약서는 고작 ‘1년 워런티 70만달러’짜리였다.

J리그는 분명 K리그보다 한수위로 평가된다. 그런데도 그곳 최고타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값이 깎인 채 태평양을 건넜다. 일종의 드림리그 진입료다. 시장상황이 특별히 달라졌다면 몰라도 천하의 이승엽도 ML행 야망을 접지 않는 한 일단 몸값 욕심은 버리는 게 옳다. 더욱이 K리그에서도 이만큼 받았는데…라며 ‘손큰’ 메이저리그에서는 더 받아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잊는 게 좋다.

이승엽이 자원봉사자가 아니듯 메이저리그 팀들도 자선단체가 아니다. 일단 발을 들여놓고 실력으로 몸값을 불려가는 게 순서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는 것은 프로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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