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을 넘게 드나들던 은행 건물 2층에는 아마추어 그림들이 자주 전시되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올라가 보곤 했다.
하루는 한 유화(油畵)앞에 한참을 서있었다. 산아래 푸른 강물, 흰모래, 노란 꽃 무리, 보랏빛 먼 산, 그 뒤에 또 산이.... 고적하고 평화롭다. 미국인들이 즐겨 쓰는 화려한 색채가 아닌 화사하면서도 낯익은 풍경이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 박목월의 시 같기도 하고, 산 너머 어디쯤에서 정태춘의 노래 실향가(失鄕歌)가 들려 올 듯도 하고 아무튼 나는 힘겨운 심신을 그 그림 위에 내려놓았다. 그림으로 들어가 깊은 잠에 빠지고도 싶었다. 적어도 내게 깨어나지 않는 수면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는 힘을 주었다. 오래 전 일인데도 시공을 넘어 내가 지치고 힘들 때면 다가오는 풍경화다.
그런데 시월에 우연히도 그림 속을 다녀왔다. 목포를 지나 해남으로 가는 잘 포장된 길, 거기서 윤선도의 귀양지, 뒷산의 비자숲이 바람 때문에 쏴- 비 내리는 듯해서 불려진 녹우당, 그리고 유물관에 잠시 마음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처음 가보면서도 낯익은 이름들 강진, 장흥을 지나 보성읍에 이르기까지 차창 밖 세상은 황금빛 바다였다. 코스모스 물결, 뚝 길의 포플러, 그 위에 무허가 까치집, 가던 세월이 구름 되어 멈춘다.
보성을 지나 활성산 봇재를 넘으면 계단식으로 다듬어진 다원(茶園)에 이르고 숲 속 찻집에서 마신 따듯한 녹차는 몸 안을 촉촉이 스며든다. 어느덧 창밖에는 어둠이 채워지고 다시 들판을 달리는 밤, 창 밖을 바라보면 가끔 나타나는 불빛뿐인데도 남도는 한 편의 시(詩)였다. 박정희 정권에 감사한다는 글이 생각났다. 그 시대 한창이던 굴뚝 산업에서 소외 된 덕분(?)으로 자기 고향 남도는 옛 모습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늦은 밤 구례를 지나 화엄사 입구 대통밥집에서 이순신이 왜적을 기다리며 마셨다는 구기자술까지 마시고 2층 황토방에 누웠다. 지리산의 한 자락에서 모처럼 깊고 푸근한 잠으로 빠져들었다. 떠돌이 나그네가 고향집에 돌아와 누운 듯이.
다음날 아침 일찍 천년고찰 화엄사로 걸어 올라갔다. 스님들이 세속의 먼지를 털듯 절간 뜨락을 열심히 쓸어내고 있었다. 국보 각황전 뒷산과 계곡을 돌아 대웅전 층계에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아주 작은 사람소리가 났다. 귀를 기우리니 석등아래 전시관 옆 작은 창고 안에서였다. 친구들과 다가가 보니 문고리가 밖에서 잠겨져있었다. 손쉽게 열고 나니 그 안에서 젊은 스님이 멋쩍은 듯 웃으며 나왔다. 속세와 연을 끊고 사는 스님도 중생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구나. 그런 일들이 스님들과의 거리감을 지워준다. 그분들도 겉과 속이 다른 사람과 이웃하기가 버거워 이곳에 온 게 아닐까.
서둘러 지리산 10경 중에 제일인 노고단(1,507m)의 구름바다를 보러갔다. 국립공원 1호인 지리산 중턱까지는 차로 오르고 거기서부터 산길을 걸었다. 나무들은 단풍의 불을 지펴 타는 속마음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머리에 그리며 오른다. 정상에서 바라본 계곡은 사진 한 장 찍을 틈만 주더니 금방 구름으로 덮는다. 금방이라도 대성통곡 할 슬픔을 감추어 버린 것이다. 민족의 영산은 그렇게 과거를 묻어 두고 지낸다. 산길을 돌아 내려오다 보니 끝없는 차량 행렬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가용들은 국토를 더욱 좁게 만들고 서로 시간을 잡아먹고 있었다.
곡성에서 된장찌개로 점심식사, 감칠맛 나는 밑반찬, 텁텁한 술, 그들의 인정처럼 넉넉하다.
곡성에서 순창을 지나 고창으로 가는 길에서 나는 보랏빛 산과 푸른 물줄기 황금빛 들녘과 흐트러져 피어있는 가을꽃, 은행 이층에서의 그림을 만났다.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나서 이제 여한이 없네. 그랬다는 글귀가 생각났다.
샌프란시스코는 정말 아름답다. 그러나 그곳에서 25년을 살아왔는데도 서양 여인을 보듯 내게는 언제나 낯설다. 처음 다가간 남도는 함께 질곡의 세월을 이겨낸 여인처럼 가슴 찡하게 따뜻했다. 산자락에 옹기종기 머리 맞댄 집들과 감나무들, 그곳에 나는 미움과 용서와 사랑을 차례로 내려놓고 돌아왔다. 정말 여한(餘恨)이 없어진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