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 의식과 발전의 함수 관계
2003-11-29 (토)
고대 그리스 철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 존재의 근원에 대해 ‘현상’과 ‘본질’을 나누어 보는 사고로 ‘감각’과 ‘이성’을 대비시켰다.
철인으로서 역사에 한 획을 긋는 그의 사상 밑에는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적 방법으로 유명한 ‘산파술’과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깔려있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에 열광하던 플라톤과 그를 신봉하던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스승의 이론과 사상을 비판과 강조로서 재정립 서양 철학을 발전시켜 왔음을 알 수 있다.
비판이란 역설적 해석에서 관심과 사랑이다. 비판이 전제되지 않는 사상은 맹종으로 치닫게 되어있다.
논리적 비판의 견제는 정의(Definitio)를 생성한다. 인간학에서 비판은 존재론적인 형이상학(Metaphysics)의 추구이다. 성장과 발전의 이면에는 비판의식의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물질의 단계에서 정신의 단계로 정화되어 가는 과정의 설정은 비판의식이 존재할 때에만 가능하다. 비판의식은 자타가 인정하는 성장과 정의의 실현임에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비판의식은 감각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논리적 사고의 결핍에서 나오는 이성의 마비 현상이 뚜렷하다.
기자의 비판의식에 의한 지적과 질문에 민감하게 목숨을 거는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하다. 칭찬만 원하는 취재원과 비판의식 사이에서 늘 고뇌하는 것은 기자의 몫이 되어버렸다.
비판의식이 없는 기자를 원하는 취재원은 신문을 한낱 개인의 홍보지로 착각하고 있는 듯 보인다. 사회 현상의 비판적 시각은 정화차원을 넘어 윤리로 완성된다.
한인사회의 리더나 한국을 대표하는 사람이라면 비판의식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어야한다. 칭찬만 원하는 유아적 사고에 머무르는 한 발전은 없다. 개인 자격이라면 비판의 대상에 포함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한 단체를 대표하는 리더는 따가운 질문과 비판 속에 숨어있는 성장과 발전의 본질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식이 없는 사람은 이 사회의 리더로서 자격이 없다.
기자의 질문과 비판적 시각은 개인이 아닌 독자의 대리 역인 것이다. 비판적 사고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기사 한 줄을 기자 한사람의 대상으로 동일시하는 현상을 보인다. 기자의 질문 역시 개인이 아닌 한인사회의 의문점이며 보편적 시각인 것이다. 그런 보편적 비판과 질문들을 부정적 편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안타깝기만 하다. 비판과 논쟁이 가장 치열했던 그리스 시대의 아테네 문화를 심도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판의식이 활발했던 시대의 문화가 화려했다는 함수관계를 역사가 고증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쉽게 그리스 문화의 훌륭함을 말한다. 그 속에 치열하게 숨쉬고 있는 비판과 논쟁을 보지 못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