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3-11-26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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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데이트

지난 토요일엔 바람이 몹시 불고 날씨가 추웠는데, 그날 나는 친구와 하루종일 산과 바다를 돌아다니며 데이트를 즐겼다. 언젠가 ‘가을낙엽을 밟고 싶다’고 중얼거렸던 내 말을 잊지 않고 날 위해 하루를 비웠다는 친구의 전화. 언제나처럼 노래하듯 밝고 높은 그녀의 목소리는 축 처져있던 일상을 화들짝 살아나게 해주었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옷을 단단히 끼어 입고 집을 나섰다. 나의 외출에 대해 늘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를 주는 아들이 캠핑을 떠나 자유스런 기분이 된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날씨는 ‘쨍’ 소리 날 것처럼 청명했고, 쌀쌀한 바람에 정신이 버쩍 들었다.


하루종일 둘이 뭘 하자는걸까? 궁금해하면서 셔먼 옥스에 있는 친구 집을 찾았을 때 그녀는 아이처럼 좋아라하며 뛰어나왔다. 나보다 나이가 일곱 살이나 많지만 삶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이 10대보다 더 많은 소녀아줌마. 예술적 감성이 특별난 탓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언제나 나를 문화적 열등감에 빠지게 만드는 친구다.

좋은 아티스트들의 그림을 많이 수집하는 컬렉터이면서, 음악에 대단한 조예와 끝없는 사랑을 가졌고, 패션 스타일은 모델 저리가라로 센스있는 멋쟁이이며. 음식도 잘 하고 커피도 맛있게 끓이는 여자.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즐길 줄 아는, 감각이 파릇파릇 살아있는 특별한 사람이다. 그녀가 그날 나를 데리고 돌아다닌 곳들의 이름은 이렇다.
프랭클린 캐년 레이크, 윌 로저스 메모리얼 파크, 세라 수도원, 엘 마타도어 비치…

어딘지 아는 사람? 모르겠지? 나도 놀랬다. 모두 산타모니카 산맥과 말리부 해변 근처에 있는 곳, 우리가 사는 데서 1시간도 채 안 걸리는 가까운 곳에 위치한 명소들인데 LA에서만 22년을 살아온 나도 전부 처음 가봤으니 아마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네군데의 공통점은 사람이 거의 없이 한적하면서 자연이 자기 모습 그대로 나를 안아준다는 점. 가는 곳곳마다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서 감탄을 하다하다 못해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제일 먼저 갔던 프랭클린 캐년 레이크는 산타모니카 숲 깊은 곳에 숨어있는 작은 호수. 가을색이 완연한 나무들 아래 수십마리의 오리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이 호수는 운치가 남달라서 영화 배경으로 많이 촬영된 곳이라고 하였다.

콜드워터 캐년 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들른 베벌리 힐스의 윌 로저스 파크에서는 어른 팔뚝만한 잉어들이 헤엄치는 모습에 경탄했고, 말리부를 지나 올라간 세라 수도원(Serra Retreat Center)에서는 침묵의 경건과 산의 정기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산을 병풍처럼 뒤로 두르고 말리부 비치를 내려다보며 산 정상에 올라앉은 세라 수도원은 건물이며 경치가 어찌나 수려한지 현실세계라고 믿어지지 않았고, 정말로 하느님과의 교감을 위해 지어진 곳 같았다.

이날의 절정은 주마 비치 바로 옆에 위치한 엘 마타도어(El Matador) 비치에서 맞이한 석양. 남가주의 여타 해변들과 분위기가 전혀 다른 엘 마타도어 비치의 절경은 처음 바라보는 순간 ‘숨이 멎는 듯한’ 감동을 느끼게 했다. 영어로 ‘breathtaking’이라는 표현이 절로 떠오르는 그 곳에 대해서 더 이상 묘사하지 않으련다. 입구가 작아서 놓치지 쉽지만 꼭 한번 모두들 찾아가 보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우리가 해변가를 걷는 동안 태양은 점점 아래로 떨어졌고 드디어 수평선과 닿자마자 빠른 속도로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태양의 붉은 빛과 노란 빛, 바다의 푸른빛과 보랏빛, 차가운 공기의 회갈색이 어우러진 신비한 석양 풍경에 우리는 넋도 잃고 말도 잃었다.

다시 산을 넘어 밸리로 돌아와 이태리 식당에서 즐거운 저녁식사를 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집에서 맛있는 커피 한잔을 끓여 마시고 떠나온 시각은 무려 밤 12시.

친구는 내가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들만 골라서 데리고 다녔던 것이다. 하루 종일 적지 않은 거리를 운전하고, 저녁까지 근사하게 사준 친구를 둔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 때로 축 처져있는 친구에게 이유없이 잘 해주는 일, 나도 한번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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