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이 무거워요”
2003-11-24 (월)
40대 후반인 대기업 이사로 지사장 격인 K씨. 얼마 전 한 미국계 펀드가 지분 50% 이상을 확보, 주인이 바뀌자 K씨는 한국과 통화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자신이 모시던 최고 책임자는 이미 물러났고 같은 이사들도 여러 명 교체됐다. 자신도 언제 같은 처지가 될 지 몰라 고민이다. 한 집안의 장손이라는 마음의 짐까지 겹쳐 잠 못 드는 밤이 늘고 있다.
“월급의 절반이 들어가는 사교육비 부담이 가슴을 짓누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두고 갈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려중입니다”“요즘엔 30대들도 직장에서 명예퇴직 하는 경우가 늘어나 주재원 모두가 갈등을 겪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비슷한 또래의 40대 주재원들이 귀국 문제로 고충을 털어놓을 때마다 영주권이 있는 내 자신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귀국을 준비하는 주재원들이 털어놓는 공통된 말들이다.
한국 회사 해외 주재원, 유학생들의 귀국 발걸음이 갈수록 무거워지고 있다.
해외로 나올 때는 외국 생활에 대한 설렘과 회사에서 인정받았다는 뿌듯함으로 즐거웠지만 들어가는 마음은 가볍지가 못 하다. 온통 신문을 열면 교육문제, 취업문제, 조기은퇴 등 고개를 돌리고 싶은 뉴스뿐이기 때문이다.
한국행을 주저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뭐니뭐니 해도 자녀교육과 직장 문제.
지난해 12월 부장으로 승진해 한국으로 영전했던 한 대기업 중견간부 C씨는 자녀 교육문제로 부인과 두 자녀를 남겨둔 채 혼자만 귀국 짐을 꾸렸다가 두 달만에 사표를 내고 미국으로 다시 건너와 사업을 하고 있다. 직장분위기를 따라가기도 어려웠지만 조기은퇴 부담 때문에 결단을 내렸다.
“제가 1992년 첫 임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는 다시 적응하는 데 4개월 정도 걸렸습니다. 두 번째 해외근무를 마치고 들어간 1999년에는 적응에 두 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어요. 이번에는 아마 2년은 투자해야 변화의 추세를 따라잡을 겁니다. 한국의 변화 속도는 너무 빨라 까딱 잘못하면 뒤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재원으로 나왔다 회사가 존폐 위기에 놓이거나 주인이 바뀌면 고민은 더 커진다. 돌아가도 자리가 보전된다는 확신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남고 싶어도 비자 문제가 걸 린다.
이같은 상황은 유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지난 9월 미국에서 경영학박사학위를 받은 김모(35)군은 지난 8개월동안 일자리를 찾았지만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해 고민이다. “대학이나 기업이나 채용공고가 나질 않습니다. 때론 학위가 부담스럽기만 하다”고 털어놨다. <김호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