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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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는 고발한다

2003-11-2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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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의 창]

▶ 유니스 김<회사원>


모두가 평등함을 느끼기 위한 기발한 발상으로 ‘목욕탕 미팅’이 제안되는 걸 본 적이 있다. 제복 또는 모든 신분을 나타내는 표식을 다 벗어버리고 나면 신분이나 직위가 주는 중압감 에서 벗어나 너도 나도 모두 같은 사람이라는 걸 실감나게 느끼지 않겠느냐는 취지 에서이다. 물론 한국처럼 대중 목욕탕 문화가 있고 남자들만의 공간이라는 전제가 있어야만 하다.

이 곳 미국에 있는 누드 비치나 각종 누드 시위도 비슷한 맥락일 거라고 생각한다. 곧 누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연으로의 회귀, 또는 자연과 완전히 일치함, 모든 인간이 만든 장식(신분, 직위, 체면 등)을 벗어버림 등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누드=자연’ 이라는 순진한, 또는 순진해 보이는 견해의 이면에는 또 다른 더 큰 진리가 있다는 걸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 있다. ‘누드=돈’이라는 가장 명백하고 가장 실감나는 공식, 이 공식은 더군다나 돈이 되는 누드는 젊은 여자 그리고 특히 연예인일 경우 특히나 그 공식에 한치의 예외도 없이 통한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인터넷의 발달로 미국에 있는 한인들도 고국의 연예가 소식을 거의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다. 연예인 누가 누드집을 냈다는 기사는 이제 거의 가십거리로의 가치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누드는 과연 평등할까? 누드만큼 인간 세상의 불평등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주는 도구는 없다. 우선 몸은 그 사람의 영양상태를 알려준다. 못 먹고 산 시절에는 ‘사장배’란 하여 뚱뚱한 몸집을 보기 좋다 하였으나, 지금의 기준으로는 사장배는 질이 좋지 못한 지방과 설탕, 콜레스테롤을 섭취한 결과이다. 근육이 발달되지 않고 햇볕에 그을린 흔적이 없는 몸은 과거에는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귀족계급이라는 표시였으나 지금은 운동을 할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는 처지임을 알려준다.

누드 모델, 또는 누드 사진집은 표면에서 말해지는 것처럼 자연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인간의 몸에 대한 가치가 동물을 재는 잣대처럼 타락함을 의미한다. 애완견을 살 때 털색깔과 생김새, 그리고 품종으로 결정하듯, 몸매과 연예계의 인기가 그들의 사진의 값을 결정한다.

누드 자체가 부정해야 할 것은 아니다. 소위 바람직한 ‘누드’ 도 있다. 여름에 이 곳 주변의 누드 비치에 가 보았다면 아마 조금은 느낄 수 있다. 자연스럽고 속박에서 벗어난 듯한 누드를.

저 멀리 한국의 누드사진의 유행, 그리고 그들이 벌었다는 많은 돈들, 모두 이 곳에서 열심히 사는 우리에게는 머나먼 어디에선가 한심한 사람들이 벌이는 이상한 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끔 이리도 일상화 된 누드 사진들 뒤에 숨어있는 그 인간의 몸에 대한 왜곡된 생각들이, 밤새도록 누드 사진을 클릭하느라 빨개진 눈에 그치지 않고, 올바른 가치를 판단하는 우리 정신의 섬세한 실핏줄까지 다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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