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여의사인 박에스더는 볼티모어 최초의 한인 대학생이다.
그는 여성들이 진맥조차 자유롭게 받지 못하던 100여년전 여성환자들을 위해 살았으며, 많은 환자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혹사하다가 스스로의 명을 단축하고만 봉사 정신에 투철한 참된 의사였다.
박에스더(1877-1910)의 본명은 김점동이다. 그녀는 당시 한국에 나와 있던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의 집안일을 돕던 광산 김씨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서양 선교사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만큼 김점동은 비교적 일찌감치 서양 문물에 눈을 뜰 수 있었다. 김점동은 10세에 정동에 있던 이화학당에 네 번째 학생으로 입학한다. 총명하고 영리했던 김점동은 학업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특히 어학에 뛰어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영어를 능통하게 할 수 있게 되어 서양 선교사 통역 역할을 맡았고, 세례를 받은후 이름을 에스더로 바꿨다.
김에스더는 당시 이화학당 교장이던 스크랜톤의 소개로 의료선교활동을 위해 미국에서 온 여의사 로제타 셔우드의 통역사로 활동하던중, 셔우드가 언청이 수술을 흉터 없이 완벽히 해내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의술을 배워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을 돕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른다.
김에스더는 셔우드로부터 셔우드의 남편인 닥터 홀의 선교와 의료 활동을 돕던 박유산을 소개받고 나이 17세에 결혼한다. 이때 에스더는 서양 풍습에 따라 남편 성으로 이름을 박에스더로 바꾼다.
그리고 그 이듬해 미망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로제타 셔우드홀을 따라 남편과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김에스더는 미국의 고등학교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볼티모어의 여자 의과 대학에 최연소로 입학한다. 박유산은 아내를 볼티모어 의대에 보낸 뒤 자신은 뉴욕의 농장에서 일하면서 아내의 학비와 생활비를 댔다. 4년간을 낯선 이국땅에서 상투머리 그대로 고생하며 아내를 뒷바라지하던 박유산은 아내가 의사가 되기 직전에 폐결핵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의사가 되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 박에스더는 고종이 동대문 인근에 특별히 마련한 여성전용 병원인 ‘보구 여관’에서 일을 시작, 부임 첫해 10개월간 3,000여명의 환자를 돌보았다. 그녀의 손길을 기다리는 여성 환자가 있으면 언제 어디라도 찾아갔다. 그리고 이듬해 셔우드 홀이 세운 평양의 홀기념 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박에스더는 병원에서 환자가 오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평안도와 황해도를 두루 다니며 의료혜택에서 소외된 벽지의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그런 그녀의 노력은 곧 입소문으로 퍼져 명의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의료활동을 해나가던 박에스더는 미처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해 남편을 앗아간 병인 폐결핵에 걸리고 만다. 당시 의학 기술로 폐결핵은 손을 쓸 수 없는 병이었다. 결국 1910년, 34세의 박에스더는 자신이 돌보아야 할 많은 여성 환자들을 남겨두고 눈을 감고 만다.
개화기 초기 여성으로 태어나 남자들도 엄두를 내지 못한 미국 유학을 감행한 후 의사가 된 박에스더. 자신의 열정을 타인을 위해 기꺼이 소진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삶은 시대를 넘어 특히 우리 이민자들에게 값진 귀감이 된다.
박에스더는 미주한인이민 100주년 뉴욕사업회가 추진중인 인물로 본 미주한인 100년사에 수록될 101명중 한 명으로 선정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