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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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유물 특별전을 다녀와서

2003-11-1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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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산책]

▶ 김재범<문학박사>


고려 왕조: 한국의 계몽시대(Goryeo Dynasty: Korea’s Age of Enlightenment, 918-1392). 지난 10월 18일 개막하여 내년 1월11일 까지 계속될 샌프란시스코 아시안 아트 뮤지엄의 고려왕조 유물 특별전시회에 붙여진 이름이다.
‘웬 계몽시대?’하는 생각을 하면서 1층 고려 유물 특별전시장 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나는 곧바로 숨을 죽이며 걸음을 멈추어 서야만 했다. 입구 맞은 편 벽 전면 전체를 가득 메운 엄청난 크기의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관세음 보살의 모습이 나를 압도해 왔기 때문이다. 일부 균열이 가고, 채색이 벗겨진 부분이 있었지만 화려하면서도 위풍당당하며, 자비로움이 넘치는 자태는 마치 살아있는 듯했다. 높이 1651/8 인치, 너비 1001/8인치 크기의 이 수월관음도는 벽면을 가득 메운 그 크기뿐만 아니라 화려하면서도 두드러지지 않은 색상, 위엄과 기품이 있으면서도 자상한 얼굴, 풍만하면서도 부드러운 몸체, 흘러내리는 듯 하는 옷자락의 아름다운 곡선은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탱화에서도 볼 수 없는 장엄한 아름다움이 흘러 넘쳤다.
이 수월관음도는 원래 1310년 숙비가 충선왕이 원나라에 볼모로 가있는 동안 왕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며 5명의 화공들에게 그리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수월관음도는 유감스럽게도 현재 일본의 카가미 신사가 소장하고 있어서, 가장 주목받는 최고의 국보급 작품이면서도 국보로 소개되지 못한 것이다.

수월관음도 앞에서 한 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전시회장 안으로 들어가 다른 작품들을 둘러보았다. 수월관음도 외에 몇 가지 다른 모습의 관세음 보살도, 비로자나 삼존도, 지장보살, 문수보살 탱화와 만오천불도, 사천왕도, 나한도, 변상도 등 20여점의 탱화와 금동여래좌상, 긍동아미타불좌상 등 불상, 금강경과 묘법연화경 목판과 경전, 범종 등 불교 관련 유물이 주종을 이루는 가운데, 국보 제214호 ‘흥왕사명 청동은입사 운룡문 향완’, 국보 제 1025호 ‘청자 복숭아 모양연적’ 등 국보와 청자양각화조문 매병, 청자음각연화문 장경병, 청자음각연화문네귀 항아리, 청자화병 잔탁 등 고려청자의 은은한 빛깔과 날렵한 모습들, 어느 것 하나 눈길을 끄지 않는 것이 없었다.
두 시간이 넘도록 찬찬히 전시장을 둘러보고 난 뒤, 왜 고려 시대를 한국의 계몽시대라고 이름을 붙였을까하는 의문이 나름대로 풀리는 듯했다. 한국이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알려지게 된 어원이 된 바로 ‘고려’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고려’가 우연히 그 시기에 ‘코리아’로 세계에 알려진 사실만으로 고려 시대를 한국의 계몽시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종훈 주샌프란시스코 총영사가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표현한대로 ‘고려시대는 후삼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후 500년간 이어지면서 통일신라의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외래문화를 소화하여 우리의 독자적인 문화예술로 발전시켰고, 세계에 선보였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 뿐만이 아니다. 고려시대는 우리 민족이 독자적인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싹틔웠던 시기이기도 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등의 역사서가 발간되고, 몽고의 침입을 받으면서 나라와 민족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며 주조했던 ‘고려대장경’이 바로 그 증거들이다. 이와 함께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고려청자, 각종 불상과 불교회화, 금속공예품, 나전칠기 등 우리 역사상 가장 풍성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시기가 바로 고려시대이다. 이렇게 이 시기에 우리 민족은 우리를 자각하고 세계 속에 독자적인 우리 문화와 역사를 바로 세웠기에 ‘고려’시대는 한국의 계몽시대라 할 수 있는 것이며, 세계에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길게는 천년, 짧게는 600여년의 세월을 지나 멀리 태평양을 건너 한자리에 모인 고려 유물들을 둘러보면서, 과거의 유물로서 그 외형만 미국인들에게 보여 줄 것이 아니라, 당시 불상을 조성하고 탱화를 그리고, 불경을 간행하며, 모든 이들이 평화와 안락을 누리는 불국토를 염원했던 깊은 신심과 고려청자의 아름답고도 섬세한 빛깔과 선을 빚어낸 우리 조상들의 예술혼도 이 땅에 전해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계몽의 영어, Enlightenment는 깨달음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회가 이민 100주년을 맞은 미주 한국 동포들이 우리 문화에 다시 눈뜨고 우리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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