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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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함께

2003-11-06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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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요 꽁트]

▶ 강진숙<수필가>


여보, 둘째 고모님이 위독하시대요. 집에 들르지 말고 퇴근길로 곧장 고모님 입원해 계신 병원으로 가세요. 나도 애들 맡겨놓고 서둘러 갈 테니까.
전화를 내려놓자마자 때맞추어 학원 갔던 애들이 연달아 돌아왔다. 부랴부랴 외출 준비를 하고 아이들을 앞세워 막 아파트 문을 나서는데 친정어머니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계단을 올라오셨다.
아니 엄마, 연락도 없이 웬일이세요?
딸네 집에 오면서도 꼬박꼬박 미리 연락해야 되냐?
엄마, 또 아부지랑 한바탕 하셨나보네. 그나저나 저 지금 시댁 고모님이 위독하셔서 병원 가는 길이에요. 안 그래도 애들 맡기러 숙영이네 가던 길이니 제가 돌아올 때까지 일단 엄마도 거기 가 계셔요. 숙영이랑 얘기해서 속도 좀 푸시고.

아서라, 그 계집애가 어디 찔러 피 한 방울이라도 나올 인물이냐? 지난번에 제 앞에서 느이 아버지 흉 좀 봤더니 그런 얘기하려거든 다시는 제 집에 오지 말라더라.
사촌들과 컴퓨터 게임도 못 하게 되고 게다가 저기압인 할머니와 몇 시간을 한 공간에 있게 된 아이들은 실망의 표정이 역력했다. 아무튼지 떠름해하는 세 사람을 뒤로하고 서둘러 차를 몰았다.
암 선고를 받은 지 6개월, 상태가 계속 나빠지기는 했어도 이렇게 급하게 떠나시다니... 새삼 재작년 겨울 시증조부님 제사 때 고모부님 때문에 뒤집혀진 속을 가라앉히느라 부엌 쪽문을 열고 숨을 고르시던 그분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그날도 외며느리인 나는 시어머님과 함께 제사음식을 준비하느라 아침부터 내내 동동거렸다. 아무리 제주들이 아니라 해도 그렇지 인정머리 없는 사촌동서들은 오후가 저문 그 시간까지도 아직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요란한 초인종 소리에 현관문을 열어보니 거기에 여느 때와 다름없이 허리를 꼿꼿이 세운 둘째 고모부님이 서 계셨다.

질부가 수고가 많구만.
시고모부님은 평생 가장의 책임이라는 걸 모르고 산 사람이다. 몇 달씩 소식이 끊겼다가 불쑥 제 집이라고 찾아들어 몇 주일을 보내고는 또 훌쩍 집을 나가는 게 그때까지 그분이 살아온 삶의 방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고모님은 말할 것도 없고 외아들조차 고학 아닌 고학을 하느라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하지도 않은 처가집 제사는 꼭 챙겨 나타나는 게 집안의 불가사이였다.
처남, 그 나이 되도록 지방 하나 변변히 못 쓰나? 그분은 멀쩡한 지방을 가지고 시아버님께 생트집을 잡지 않나, 곶감 꼴이 그게 뭔고... 어허, 대추가 그 뒤로 가야지. 상차림을 하는 내게도 연달아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날도 보다 못한 고모님이 당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라고 한 마디 거들었다가 두 분이 끝내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결국 고모님이 부엌으로 피해오심으로써 그날의 싸움은 흐지부지 끝이 났고 다음해 봄 고모부님이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두 분의 평생에 걸친 긴 싸움은 마침내 영원히 끝이 나고 말았다.
서둘러 달려갔지만 결국 고모님은 이미 운명을 하신 뒤였다. 울고 있는 외아들 내외를 위로하고 나오는데 먼저 와있던 남편이 주차장까지 따라오며 고모님의 기막힌 유언을 전했다.
고모님이 남편 옆에 묻히기 싫으시데. 오죽하면 그러셨겠어. 그렇기는 해도 벌써 고모부님 옆에 고모님 자리를 사놓았다는데... 승철이 내외 입장이 곤란하게 됐어.
‘아, 고모님...’ 밤샘을 하는 남편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한 많은 한 여자의 일생이 가여워 끝내 목이 메었다. 그러다 문득 친정어머니가 떠올랐다.

두 분이 자주 티격태격은 하셔도 아버지가 워낙 속이 넉넉하신 분이라 지금껏은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냥 엄마의 응석 섞인 투정이려니 하고 가볍게 넘겨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이제부터는 엄마 하소연도 좀 진지하게 들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고모님처럼 두 분이 함께 나란히 묻히시지 않겠다고 덜컥 유언이라도 하시면 큰일이 아닌가 말이다.
느이 아버지는 평생 시계추처럼 정확하게 출퇴근하는 것 밖에는 모르는 양반이다. 그래도 내가 이러고 저러고 했으니 망정이지 그 알량한 공무원 월급으로는 언감생심 너희들 대학공부는 꿈도 못 꿨을 거다. 남들은 내가 한평생 남편 휘어잡고 신나게 산 줄 안다마는 나도 남편한테 소위 신식말로 리드라는 것 좀 한 번 당해보고 싶다. 모든 걸 다 알아서 챙겨 살아야 하는 여자는 뭐 팔자가 편한 줄 아냐?
아니나 다를까 집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엄마의 넋두리가 시작됐다. 방금 전 결심한 바가 있어 꽤 성의를 다해 들어드리면서도 문득문득 아버지 전화가 기다려졌다. 보통은 이쯤 돼서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오시고 그러면 못 이기는 척 엄마가 집으로 돌아가시는 게 정해진 순서였다.
한 삼십 분쯤 에이, 아버지도 참... 혹은 그때 엄마 고생 많이 하셨지. 등등 적당한 추임새를 넣어가며 엄마 하소연을 듣고 있는데 드디어 기다리던 전화벨이 울렸다. 그러나 오늘따라 단단히 화가 나셨는지 엄마는 절대로 아버지 전화를 안 받겠다고 버티셨다.

아버지, 제가 스피커폰으로 옮겨놓을 테니 엄마한테 하시려던 말씀하세요. 엄마 지금 제 옆에 계셔요.
이어 아버지의 조분조분한 말씨가 거실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숙희엄마, 나도 잘 알아, 당신 무능한 나 만나 평생 고생만 한 거. 하다못해 집안에 못질까지 당신 몫이었다는 걸 내가 왜 모르겠어. 그래도 내가 한가지는 잘하잖아. 보물찾기 말이야. 그 많은 세상 여자들 중에서 당신을 찾아낸 것 보라구. 내가 지금 김치찌개 끓일 테니 저녁 안 먹었으면 빨리 와서 함께 먹자구.
어느새 엄마는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고 계셨다. 그러다 웃음 띤 내 눈과 마주치자 저러다 느이 아부지 가스 불 낼까봐 그런다. 도무지 뭐 한가지 잘하는 게 있어야지, 원.
아무래도 좋았다. 두 분이 함께 토닥토닥 한 길 가는 걸로 족했다. 적어도 부모님 성묘를 따로따로 갈 일은 없어 보이니 감사할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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