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伊, 1813-1901)는 늘 작품성과 흥행성 사이에서 고민했는데 ‘돈 카를로스(Don Carlos)’ 역시 뛰어난 작품성에도 불구 무겁고 칙칙한 분위기로 인해 별로 인기를 얻지 못했다. 이 오페라의 우수성이 재발견 된 것은 1969년. 안드류 포터라고 하는 영국학자가 파리의 오페라 박물관에서 원작의 삭제된 부분을 발견한 뒤 부터였다.
베르디는 파리 오페라 관객들을 위해 ‘시칠리아의 저녁기도’,’돈 카를로스’등 프랑스어로 된 몇몇 그랜드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가장 유명한 작품이 ‘돈 카를로스’였다. ‘그랜드 오페라’란 공연 시간 4시간 이상의 대작을 말하는 것으로 주로 역사적 소재, 심각한 내용을 발레와 함께 공연하는 것을 말한다.
스페인의 왕자 돈 카를로스가 부왕의 왕비 엘리자베스를 사랑하다 비극적인 종말을 맞는다는 이 오페라는 5시간 이상의 원작의 내용이 너무 길고 지루하여 대거 삭제, 개작하여 1867년 파리에서 개막했으나 초연은 대대적인 실패를 맛보았다.
당시 53세였던 베르디는 ‘돈 카를로스’실패 이후 다시는 파리 오페라에 손대지 않았으며 이후 ‘돈 카를로스’는 파리에서 100년 이상 사장된 채 잊혀진 이름이 되고 말았다.
베르디의 적(敵)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스스로의 예술성이었다. 베르디는 ‘멕베드’를 비롯 ‘돈 카를로스’와 같는 대작을 내놓고도 흥행에는 참패하는 비참함을 맛보았다. 흥행을 위해 베르디는 때로는 원작의 삭제·개작을 강요받기도 했으며 ‘시칠리아의 저녁기도’등은 2-3차례의 수정이 강요되어 베르디의 자존을 긁어놓기도 했다.
베르디는 특유의 비극성, 극적인 박력이 맞물릴 때 그 위대성을 발휘하는 작곡가였다. 그의 80 평생은 비가극에 헌신된 한 평생이었고 비극이 아니면 거의 손대지 아니했다. 비극이야말로 그의 작품이자 인생의 주제였다.
베르디는 ‘축배의 노래’, ‘개선행진곡’, ‘프로벤자 내고향’, ‘히브리 포로들의 합창’… 등 유명한 선율들을 통해 비극 속에서 희망을 노래했다. 인생이 비극이었다면 음악은 어쩌면 베르디에 있어 그 비극을 딛고 넘어서게 하는 종교였는지도 모른다.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전 생애를 통해 지칠 줄 모르는 것이었는데 그가 남긴 40여편의 오페라는 바그너와 함께 인류가 남긴 가장 위대한 오페라 유산들로 평가받고 있다.
베르디는 이태리에서는 악신(God, 樂神)으로 추앙받는 존재였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영혼을 뒤흔드는 심도 깊은 감동으로 이끌어간다. 일회적이며 폐부를 찌르는 직선미, 강직성과 예리한 지적 감수성이 어우러져 불세출의 비극 오페라를 탄생시켰다. ‘비바 베르디!’. ‘베르디 만세’라는 고유 명사를 창출시킨 베르디였지만 파리 같은 흥청거리는 도시에서는 흥행의 참패도 맛보았다. 그 대명사와 같은 작품이 바로 ‘돈 카를로스’였다.
’돈 카를로스’는 베르디가 프랑스어로 작곡한 가장 박력 넘치는 몇 안 되는 대작이었다. 창연한 맛, 그랜드 스케일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돈 카를로스’는 ‘나부코’, ‘멕베드’등에 이어 베르디 작품중에서 가장 음악적 박력을 맛볼 수 있는 또 다른 명작이었다.
10월 26일부터 펼쳐지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의 ‘돈 카를로스’공연은 이번 시즌 최고 하이라이트로 찬사 받으며 절찬리에 공연 중에 있다. 특히 대제사장역으로 출연중인 한인 아틸라 전씨는 크로니클지로부터 대제사장 특유의 카랑카랑하면서도 공허로운 분위기를 살려냈다며 높이 평가받고 있다.
막이 열리면 스페인의 생 주스트 수도원. 멀리서 수도사들의 기도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돈 카를로스의 독백이 시작된다. 카를로스는 미모의 엘리자베스(앙리 2세의 공주)를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되나 부왕 필리브 2세가 정략상으로 그녀를 왕비로 맞이 했기 때문에 카를로스의 행복은 무너지고 말았다.
카를로스는 실연의 상처를 씻기 위해 할아버지 카를로스 5세가 말년을 보낸 수도원에 온 것이다. 부왕과 엘리자베스, 그를 사랑하는 또 다른 여인 마드리드 사이에서 고뇌하는 카를로스는 결국 지상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수도원에서 비극적인 막을 내리고 만다.
▲돈 카를로스 남은 공연 : 11월 7일(7pm), 13일(7pm), 16일(1pm), 19일(7pm) 연락 - (415)864-3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