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3-10-01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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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코더

몇 달전 교회에서 하는 캠코더 편집 클래스를 열심히 쫒아다니던 남편이 캠코더를 하나 사갖고 들어왔다. 요즘 것들이 다 그렇지만 손바닥 안에 딱 들어가는 앙징맞은 것이, 오래전 쓰던 것과는 모양서부터 기능까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10여년전 아들이 어렸을 때 찍어둔 수많은 캠코더 테입을 컴퓨터를 이용해 멋지게 편집하겠다고 벼르던 남편은 캠코더를 사온 첫날부터 이리 굴리고 저리 뜯어보며 성능을 시험하더니 드디어 우리를 불러모아놓고 옛날 테입을 찾아내 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 세식구는 말할 수 없이 이상한 감동과 추억과 흥분에 휩싸여 말을 잊었다.
아들이 한 살 무렵 찍은 것이니 11년전 우리 가정의 모습.

아기는 한량없이 귀엽고 예뻤고, 우리는 그 아이가 하는 별별 짓을 다 찍으며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아기를 따라 놀아주고 안아주고 뽀뽀하고 목욕시키고 먹이고 입히고 장난치는, 온갖 유치한 모습들이 테입속에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아들은 제 어렸을 적 놀던 모습들을 신기하고, 쑥스럽고, 놀라기도 한 표정으로 말 한 마디도 없이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철 들고 처음 보는 자기 아기때 모습이 몹시나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아울러 자기 하나를 놓고 엄마 아빠가 얼마나 지극정성 이뻐하며 키웠는지가, 여러말 할 것 없이 그 안에 다 들어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또 젊은 남편의 모습이 있었다.
지금보다 살이 덜 쪘고, 머리카락이 좀더 많았고, 얼굴도 훨씬 청년스러운 모습. 그동안 매일 보면서 늙은 줄을 몰랐는데 남편도 주름이 늘었던 것이다.

나의 모습은 잘 나오지 않는 것이 주로 내가 들고 다니며 찍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더라도 집에서 화장을 안하고 있는 후진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카메라를 요리조리 피해 다녔겠지.

옛날 우리가 살던 글렌데일 아파트와 라크레센타 산꼭대기의 집이 화면을 통해 그대로 되살아났다. 신혼살림, 그때 그 가구들과 함께. 그래, 그때 우린 저렇게 알콩달콩 살았지. 인생에 대한 자신이 있었고, 실패를 몰랐고, 젊고 행복했지.

감정이 그때의 나날들로 이전되면서 나의 마음도 왠지 젊어지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살면서 차곡차곡 쌓였던 인생에 대한 좌절과 실망, 남편에 대한 불만과 원망 같은 것들이 조금씩 희석되는 것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옛날 모습을 보면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도록 해주는 캠코더는 정말 좋은 문명의 이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다녀와도 사진을 찍어두지 않았으면 기억나지 않을 장면들이 태반인 것처럼, 그 모든 장면들은 캠코더가 없었던들 정말 단 하나도 생각나지 않을 순간들이었다.

우리는 아이가 서너살때쯤까지 찍어주다가 그 뒤로 중단했다. 캠코더가 없어져 버린 탓도 있고, 살면서 그런 일에 계속 주의를 기울일 만큼 여유롭고 낭만적이지 못했을까.

더 찍어두지 않은 것이 너무도 후회가 되었다. 그 이후 킨더가튼을 다니고 초등학교를 다니던 때의 그 귀여운 모습, 지금처럼 뚱뚱하지 않고 날씬하고 예뻤던 모습들이 다 담겨 있을텐데 이렇게 아쉬울 데가 있을까.

남편이 꼴 보기 싫어질 때, 아내가 미워질 때, 아이들 때문에 속이 터질 때, 옛날에 찍어둔 캠코더 테입을 찾아 한번 틀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가 캠코더를 찍을 때는 생일, 여행, 놀이 등 즐겁고, 특별하고, 행복한 순간들뿐이니 마음이 그때로 돌아가면서 그때의 흐뭇했던 마음도 자연스럽게 전이되어올 것이다.

아이가 더 크기 전에, 내 모습이 하루라도 더 젊었을 때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찍어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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