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판 승부

2003-09-18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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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요 칼럼]

▶ 최재명(엔지니어)


5년 전 막내가 갓 100일이 지났을 때 장모님은 난생 처음 미국 땅을 밟으셨다. 말이 미국 구경이지 실은 많은 시간을 방에 갇혀 지내시다시피 했다. 당연히 영어라고는 들어보지도 못하였으니 밖으로 나가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때는 어린 막내를 아내보다도 장모님께서 더 많이 돌보아주셨다. 그래도 무료한 기색 전혀 내지 않고 사위 덕분에 미국 구경 한 번 잘 한다고 하셨다. 첫 미국 나들이인데 집에만 있을 수 없었기에 아이를 들러 메고 이름난 곳으로 구경을 다니며 사진만 찍어 드렸는데 장거리 여행에 많이 피곤하셨음을 나중에 알았다.

첫 해외여행이니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할 것도 많이 가져가야 하고 친척들에게도 조금은 내색을 해야 한다며 가방을 꾸렸는데, 타국에 딸 식구를 남기고 혼자 돌아간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셨나, 온 식구가 공항에 나가 수속을 마치고 간단히 요기도 한 뒤 탑승을 위해 게이트로 들어가야 할 때, 장모님께서 웃으시며 집에 가 침대 베개 밑을 봐. 내가 자네 용돈을 좀 놓아뒀어.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어리둥절하며 죄송한 마음으로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장모님의 첫 미국 나들이는 끝나고 사위와 장모의 승부는 장모님의 펀치 한방에 사위의 K.O패였다.
그리고 올해, 이제 막내도 학교에 갈 나이가 된 시점에 다시 장모님께서 미국을 찾으셨다. 한번 다녀가시더니 방안에 답답하게 게셨어도 아이들이랑 지내시던 시절이 그리우신 모양이다. 할머니 오신다는 소식에 아이들도 ‘할머니 언제 오셔?’ ‘할머니 아직 안 왔어?’ 하며 손꼽아 할머니 오시는 날만 기다렸다. 5년 전에는 갓난아이랑 주무시다 이제는 개구쟁이가 된 막내랑 한방에 있으시게 되었는데 처음엔 막내가 싫어하더니 며칠이 지나자 오히려 할머니 침대에서 같이 자고싶다며 투정이다. 그리곤 계속 할머니만 따라 다니는 것이다. 사실 처음엔 이미 이곳 생활에 적응해진 아이들이 할머니와 잘 지낼까 걱정을 하였는데 한낱 기우였다.

장모님께서 오시고 곧 내 생일이 되었고, 생일 선물이라고 남방과 용돈을 내미셨다. 무척 고맙고 감사한데, 어른께서 주시는 용돈을 안 받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덥석 받을 수도 없어 당황하다 당신의 마음을 감사히 받아들며 코끝이 찡해졌다. 이번에도 장모님께 먼저 K.O 펀치를 한방 맞은 것이다. 그리고 두 달 조금 넘게 계시다 고국의 추석을 맞이하여 귀국하게 됐는데 설마 이번에도 침대에 또 뭘 나두시지는 않았겠지 하며 귀국하는 날 온 방을 뒤져보곤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공항으로 향했다.
다음날 집이 허전해 지고 막내의 방이 텅 빈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칠순을 바라보니 몸도 많이 쇠약해지시어 거동이 조금은 불편하신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리고 한국에 도착했을 시각이 되어 전화를 드리니 무사히 잘 도착하셨다는 음성이 밝게 들려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그러나 통화 맨 마지막 장모님의 말씀은 다시 우리에게 K.O 펀치를 날리시어 한판승부를 가르는 것이었다.
내가 오기 전에 부엌 냉장고위에 뭘 좀 나뒀어. 자네 용돈이나 하라고.......
장모님, 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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