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차를 마시고 싶은 날이 있다

2003-09-06 (토)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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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의 창]

▶ 김혜선<주부>


가을이 문을 두드리던 날, 친구로부터 소포 하나가 날아왔다. 반가움과 설레임 속에 열어보니, 그 안에는 석정 스님이 그리신 한 폭의 난화(蘭花)와 향기로운 우롱차 한 통과 친구가 정성껏 한지에 써 준 시 한 수가 있었다. 석정 스님은 불화(佛畵) 가운데서도 주로 달마도를 그리시는 유명한 분이신데 친구는 내게 그분의 특별한 작품인 난화를 보낸 것이다.
그림 속의 난은 내가 그동안 보아왔던 다른 난처럼 그리 화려하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볼수록 오래 알고 지내온 사람이나 오래 간직해 온 손때 묻어 있는 물건을 대하듯 마음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마치 난꽃이 피어 향기가 은은히 감도는 것도 같았고 잎 사이로
나비가 날아 드는 듯 하였다.그 난그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불현듯 차(茶) 생각이 간절했다. 이처럼 귀한 것을 선뜻 보내 준 친구와 함께라면 많은 말을 하지 않더라도 한 모금씩 차를 마시면서 그의 소중한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고 우리의 우정 또한 차의 향과 함께 깊어 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날이면 나는 차 한잔의 여유가 간절해진다. 친구들로부터 반가운 소식을 받았을 때, 잔잔히 비가 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길 때,정원을 가꾸다가 잠시 쉬고 싶을 때, 혼란한 마음을 다스리려 산책을 다녀 왔을 때, 향기로운 차 한 잔이 좋을 것이다. 조금 더 사치를 부린다면 우리나라 녹차 가운데에서도 가장 이른 철에 따서 만든 우전(雨前)차를 선택하고 싶다. 곡우(穀雨)전에 땄다고 하여 이름 붙인 우전(雨前)차는 꼭 사람의 손으로 이른 봄의 새순을 한 잎 두 잎 따서 만든 차이다. 그 섬세한 맛과 향에 취하면 일상의 번거로움을 벗어나서 연한 마음으로 한가로움을 누릴 수 있다. 겉으로는 드러내어 표현하기를 자제했던 우리 선조들은 차를 마시며 마음이 찌꺼기나 불편함을 삭히는 지혜를 가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들이 무심히 쓰는 일상어 중에는 차를 가까이하는 우리 선조들의 삶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예를 들자면, 차례(茶禮)와 다반사(茶飯事)란 단어에서 보듯이 그 당시의 생활에서 차를 마시는 일은 요즘의 우리가 커피나 소다수를 마시는 것처럼 생활의 일부였다. 지금 성황리에 방영되고 있는 TV 프로그램 다모(茶母)에서도 그 당시의 차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다모의 역활은 조선시대의 포도청에서 활약하던 여형사이며 동시에 다시청(茶時廳)에 모여 차를 마시며 정사를 논하는 풍속이 있었던 그 당시 관사에서 다사를 맡아 보는 차모였다고 한다.


커피가 대중화된 요즘에 와서는 좋은 물을 골라 제대로 끓여서 우린 차를 마신 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그렇지만 차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과 여유는 내게 고향에 온 듯 가슴 한가득 훈훈한 기쁨으로 다가온다. 모든 것이 빠르고 바빠야하는 현대인의 삶에서 내가 실천할 수 있는 한가지의 ‘느림의 미학’이다. 내일은 나도 맛있고 향긋한 차를 구하여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던 친구, 소원했던 친구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고운 포장지에 마음을 담아 싸서 보내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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