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떠나가고, 나는 거기 남아서> 라는, 89년에 한국에서 출간된 책 한 권을 지금도 가끔 꺼내 읽는다. 무엇인가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때나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면 친구에게 조언을 구하듯 손이 가는 그런 책이다. 10년도 더 전에 산 책이라 밑줄을 그은 붉은 펜은 8월의 잔영처럼 색이 바랬지만 갈피마다 담겨진 내용만은 여전히 싱싱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이 책은 일제 아이힝거를 비롯한 유럽의 여류지성 스물 네 명이 쓴 수상록인데, 일관된 주제는 ‘이별’이다. 이별의 가장 보편적인 형태인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헤어짐에서부터 시작해서 자기 자신과의 이별, 여러 가지 압박이나 관습에서의 해방, 그리고 추억이나 꿈조각들과의 이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이별이 그려져 있다.
이별의 공식이 그 전반부에 언제나 사랑을 깔고 있는 것은 아니란 것을 이 책은 알게 해 준다. 우리는 때때로 권태 때문에도 이별을 하고 혹은 한여름의 창백한 햇살 때문에 문득 떠남을 생각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별이란 그렇게 갑작스럽게 다가와 가슴 한 귀퉁이를 황홀하게 갉아대기 시작한다. 그래, 황홀하게 - 사실 현재의 실존으로부터 떠남이란 것은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황홀한지 -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늘 이별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헤어짐은 본능적인 날카로움, 수성(獸性)에 가까운 감각으로 몸 여기저기를 찔러대는 것이므로.
‘모든 이별에는 죽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 고 페기 파르나스는 말한다. 별리의 아픔. 그러나 어찌 이별의 여운이 아픔으로만 남을 것인가. 헤어짐의 빛깔은 갖가지여서 때론 검은빛과 칙칙한 잿빛을 띠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자주 노랑이나 연두색의 생기를 지피기도 한다.
새카맣게 그을린 숯이 바알간 꽃불을 만들어내듯이 그 속에 빛나는 불씨를 품고 있는 이별이 또 얼마나 많은가. 가장 뜨겁고 가장 환한 불씨, 혹은 아주 오랫동안 불이 붙지 않거나 쉬이 사그러들지도 모르는 불씨를. 어쩌면 그 불씨가 긴긴 날들을 캄캄한 잿더미 속에 갇혀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그 세월을 영원이라고 말하진 않을 것이다.
그 동안 여러 번 가족과 친구를 떠나고, 스스로를 구속한다고 느꼈던 이런 저런 상황을 떠났다. 떠나는 순간마다 적지 않은 두려움과 고통이 있었지만 내 안에서 솟구쳐오르던 갈망이 언제나 그보다 더 컸던 것 같다.
새로운 만남을 위해, 지금의 모습에서 변화하고 더 나아가기 위해선 ‘만날 때 늘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지도 모른다. 내 안에서 이별은 언제나 눈부신 비상(飛上)의 첫 번째 날개짓이 되기를 희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