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집으로 가는 길

2003-08-15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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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의 창]

▶ 김현심<학생>


새벽에 걸려온 국제전화 한 통. 잠결에도 친구 음성에 맥이 다 풀려 있어 퍼뜩 정신이 났다.
"왜 그래? 무슨 일이 있는 거니?" "그냥...네 생각이 나서...어쩌니, 내가 시간을 잘못 알았나 봐."
잠을 깨워 미안하다는 친구를 다그쳐 자초지종을 들었다. 아니나다를까, 남편이 시매부를 위해 연대보증을 선 일이 잘못 되어 집을 비워주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갓 스물이 넘은 나이에 결혼해서 갖은 고생을 하며 살림을 꾸려온 친구의 처지를 가까이서 보아온 터라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작은 아파트지만 ‘내 집 마련’을 했다고 들떠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 집을 내 줘야 하다니, 그것도 자기 잘못으로 인한 일이 아니니 얼마나 속이 쓰릴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는 나는 "어쩌니! 어쩌니!"만 연발하고 있었다.

친구가 아파트를 장만한다고 했을 때, ‘평생 벌어 겨우 마련하는 집을 서른도 되기 전에 가졌다’며 부러움 반 시샘 반 입 있는 사람들은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러나 그이는 집 한 칸 마련하기 위해 한창 푸르러야 할 20대를 숨 한 번 크게 안 쉬고 지냈다. 시장 좌판에서 티셔츠 한 장 사는 것도 수십 번을 망설였고, 미장원 한 번 가는 걸 못 봤다. 그이의 집은 단순한 삶의 공간으로서의 집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는 갖은 노력 끝에 그들 부부가 지어낸 한 편의 꿈이었다.
언젠가 친구 모습이 보기에 딱해서 "꼭 그렇게 아둥바둥 살아야 하냐?"고 충고 아닌 충고를 한 적이 있는데, "우리 아이들 눈치 안 보고 살게 하고 싶어." 라는 그이의 한 마디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처구니없지만, 유치원에 다니는 꼬마들이 "니네 집은 몇 평이야?" 하는 따위의 질문을 하고, 비슷한 평수에 사는 아이들끼리 무리 지어 노는 경우가 실제로 있다는 말을 나도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작년에 서울에 나갔을 때 곳곳마다 수없이 건축되는 빌라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부모님이 계시는 동네도 그 전 해까지는 단독주택이 대부분이었는데 다 헐리고 3,4십평짜리 빌라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집 한 채 가지고 있기보다는 층을 올리고 방을 여러 개 만들어 분양을 하거나 세를 놓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익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빌라란 건물들은 공사 기간 3,4 개월이면 한 동씩 뚝딱 딱 세워진다는데, 꼭 도깨비 방망이에서 집이 나오는 것 같았다. 건축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진 몰라도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날림 공사가 분명한 건물들이 너무 많았다. 그렇잖아도 재해가, 그 중에서도 인재가 많다는 한국인데, 10년 뒤 쯤 곳곳에서 빌라 사고가 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저절로 솟아난다.


"현대의 집에는 탄생도 죽음도 결혼도 없다"고 한 건축가 김진애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문명 속에 사는 인간의 집이 그런 태초의 생명력을 잃은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 되었다. 아마 다시는 집과 인간이 하나 되는 원시의 생명을 회복하진 못하겠지만 아직도 집은 아이들을 기르고 꿈을 꾸고 사랑을 키우는 한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최소한 그 공간의 절대성만은 더 이상 훼손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오늘은 그만 간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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