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화무십일홍’이라…

2003-06-1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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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단 1원도 준 게 없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모든 책임을 지겠다.” DJ정권에서 장관, 청와대특보, 비서실장 등을 지내며 말년에는 ‘부통령’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고관대작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린 박지원씨 말이다. 그냥 사석에서 한 말이 아니다. 국회에 나와 당당히 한 ‘증언’이다.

년 전의 이 기록을 들쳐보면서 ‘국록을 받는 공직자가 세상 어느 천지에 이처럼 국민의 눈과 귀를 속이는 거짓말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둘러댈 수 있단 말인가’, 분노가 가슴을 친다.

북에 은밀히 보낸 돈이 ‘최소한 5억달러’라는 사실은 이미 ‘특별검사’에 의해 밝혀졌다. 여기서 ‘최소한’이라는 표현은 그 이상의 돈이 넘어 갔다는 주장을 뒷받침 한다.


미국 의회 조사국은 약 8억달러가 흘러 들어 갔다고 발표한 바 있다. 아니 ‘10억달러설’도 터져 나오고 있는 판이다. 한 야당의원의 폭로에 따르면 현대가 5억달러를, 다른 대재벌들이 5억달러를 별도로 모아 쉬쉬하며 북한에 보냈다는 것이다. 이런데도 단 1원 한 장 간 게 없다니 기절할 판이다.
박지원씨는 머리 잘 돌아가는 이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기는 했다. 1원 앞에 ‘정상회담 대가로’라는 단서를 살짝 얹어 놓았다. 하지만 이것도 특검 조사로 뻔뻔스런 거짓말임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

지난 16일, 그 세도가 당당했던 박씨는 특검팀에 소환돼 문초를 당했다. 표정은 어둡고 외모는 초췌해 보였다. 그에겐 재벌을 압박해 돈을 보내도록 강요한 ‘공권력 남용죄’로 법의 심판대에 넘겨질 것이다. 한창 잘 나갈 때, 그는 부귀영화가 ‘화무십일홍’이라는 옛 경구를 놓고 ‘우리는 5년은 간다’고 큰 소리쳤다. 그 5년의 시간이 흐른 이제, 피의자 신분으로 밤샘 조사를 당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화무십일홍’이라는 옛 경구를 이제야 깨닫고 권력의 무상을 통감하고 있을까. 억겁의 긴 시간에서 볼 때, ‘열흘’과 ‘5년’이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그걸 모르고 권력에 취해 있던 자들이 어디 박씨뿐이랴. 아니 그가 지나간 발자국을 따라 ‘5년’을 내 세상인 양 뻐기며 걷고 있는 오늘의 권력자들이 왜 없겠는가. 역사의 되풀이, 미련한 인간들의 행군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박지원씨가 특검에 불려가기 하루 전, 그의 ‘주군격’인 DJ가 퇴임 후 처음으로 국민 앞에 나타났다. KBS TV가 ‘6.15 남북 정상회담 3주년’을 계기로 마련한 특별 인터뷰에서다. 올해로 83세인 그의 모습은 노쇠하고 목소리는 쇠잔해 있었다. 5년 전, 정권을 잡을 때만 해도 남다른 건강을 자랑하던 그가 이제는 영락없는 ‘병색의 노인’으로 등장한 모습은 보는 이들을 서글프게 했다. 콩팥에 문제가 있어 기계로 피를 걸러내는 투석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집권기간의 ‘공과 과’는 어찌됐든 인간적인 연민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또 다른 감정이 가슴을 짓누른다. 퇴임 후 예외 없이 의혹과 손가락질을 받는 실패한 집권자로 낙인찍힌,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씨 대열에 DJ 이름도 끼여든 불행한 역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그들 이마에는 모두 ‘유고’라는 옐로카드가 붙었다. 그들은 그렇다 치고 애꿎은 국민들은 무슨 업보로 이 고생이란 말인가, 자조가 또 가슴을 엄습한다.
그럼에도 DJ 회견은 변명과 자찬으로 일관했다. 남북 정상회담 덕분에 한반도에 전쟁이 없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는 점, ‘햇볕정책’ 이외에 대안은 없다는 점, 나라를 위해 일한 사람들(대북정책 주역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게 안타깝다는 점 등을 누누이 강조했다. 또 이런 말도 했다. 촛불시위는 좋지만 반미는 곤란하다, 미국은 우리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나라다.…

쇠잔한 목소리로 쏟아내는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서 불현듯 다시 확인된 것은 ‘역시 달변가’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달변은 설득력이 없었다. 진솔한 고백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김정일의 호의 때문인가. 천만의 말이다. 북이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는 절대적 이유는 주한 미군이 남쪽에 버티고 있기 때문임은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미군이 오늘 당장 빠진다면 김정일의 표정은 돌변할 것이다. 자신의 정권이 건넨 수억달러로 북한이 미사일과 핵무기를 개발해 왔다는 사실을 DJ는 왜 인정하지 않는가.


촛불시위와 미국의 평가에도 모순은 발견된다. 촛불시위는 지난 대선 때 노무현 후보 당선을 몰아온 가장 큰 변수였다.
당시 청와대에 앉아 있던 DJ는 장갑차 사고를 둘러싼 외교 해소노력을 게을리 하고 시위 확산을 방관했다. 그가 집권 내내 친 김정일 정책을 추진하고 미국, 특히 부시 행정부와는 비우호적 관계에 있었던 것은 세상이 아는 일이다.

그런 그가 이제 와서 촛불시위가 반미로 번져서는 안 된다고 ‘바른 말’(?)을 하는 것은 뒤늦은 자각에서인가. 모처럼 얼굴을 선보인 전임 대통령으로서 좀더 국민 마음을 움직이려면 자신의 공적을 자랑해선 안 된다. 그럴 처지도 아니다. 오히려 집권 중에 일어난 잘못된 일들, 예를 들어 자신의 아들 3형제가 모두 검은 돈을 먹다 걸린 점이라든가, 실정법을 검토하지 않고 북에 현찰을 보낸 데 문제가 있었음을 솔직하게 밝히는 참회를 해야 했다.

말 잘하는 자 말로써 궁핍해진다 했던가. 딱히 DJ에게만 맞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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