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참여 막는 ‘참여정부’

2003-06-0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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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6월8일. 미국을 방문하는 국가원수들이 즐겨 찾는 센추리 플라자호텔에 한국 국무총리가 모습을 나타냈다. 이 호텔에서 4.29 범교포 피해복구위원회 관계자들과 조찬모임, 폭동피해자 대표들과의 면담이 있었다. 복구위 관계자들과 폭동피해자들은 1억달러의 장기 저리지원을 요청했고 총리는 미온적인 답변을 했다.

그런데 이날 모임에 앞서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한인사회를 대하는 정부의 자세에서 비롯됐다. 행사를 맡은 정부 관계자들이 본국언론은 ‘귀빈’ 대접한 반면 처음에 한인언론의 취재는 불허했다. 동네에 와서 토박이들을 푸대접한 것이다.

영사관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한인 취재진의 접근을 봉쇄하려 한 것인지, 총리 수행비서관이 일방적으로 지시를 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관계자들과 취재진간에 잠시나마 실랑이가 오갔다. 그래도 선거에 의해 대통령이 됐지만 쿠데타 주역이란 오명을 벗지 못한 노태우 정권의 타고난 한계라고 자위하면 그뿐이었다.


그러나 국민들에게 문을 활짝 열겠다며 갓 들어선 노무현 정부에서 이같은 구태가 답습되리라고 생각한 한인은 거의 없었을 게다. 새 정부가 명칭을 ‘참여정부’로 확정했을 때 어느 누가 ‘언로 차단’의 현실화를 상상이나 했겠는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들 하지만 ‘참여정부’가 참여를 막을 것으론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지난 주 청와대비서실장이 아르헨티나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뒤 귀국 길에 LA에 들른다고 했을 때만도 한인사회는 그의 방문을 반기며 이번 기회에 본국 정부의 개혁에 한인들이 측면 지원할 수 있는 방안과 한인사회의 여러 현안을 논의하는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했었다. 또 노 대통령이 미국에 왔을 때 LA를 제외한 데 대한 서운함도 달랠 수 있다고 여겼다. ‘참여정부’의 권부 핵심인사이니 그럴 만도 했다.

노 대통령이 LA에 오지 못한데 대해 "대통령을 대신해 양해를 구한다"며 "고국 걱정을 하는 한인들의 시름을 덜어주러 왔다"는 비서실장의 간담회 발언에 시비 걸 일은 전혀 없다. 한인간담회 행사 자체를 한인언론에 알리지 않고 이곳에 와 있는 본국 특파원만 ‘모신 채’ 진행한 배타적 사고방식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행사장에서도 본국 특파원들을 위한 좌석은 마련돼 있었지만 한인 취재진들은 꾸어온 보리자루 신세가 되고 말았다. 영사관이 자발적으로 비서실장의 간담회를 한인언론에 보도 의뢰하지 않았던 것인지, 총영사 이임을 앞둔 레임 덕 현상인지, 아니면 비서실장 측이 한인 언론을 통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영사관의 조언을 무시하고 아예 따돌리려 한 것인지 진의는 알 수 없지만 문제의 발단이 어느 쪽에 있든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 같이 참여정부에서 녹을 먹고 있는 ‘공복’이란 점에선 초록이 동색이다.

LA에 와서 한인들과 간담회를 하면서 한인언론에 쉬쉬하는 것이 참여정부의 기본방침인가. 참여는 한국의 유권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해외동포들도 본국의 발전을 위해 조언할 수 있다. 눈을 뜨고 귀를 열고 보고 들어야 한다. 한인 언론을 무시한 것은 한인사회를 우습게 본 것과 진배없다.
광주에서 광주일보 없이, 대전에서 충남일보 없이, 부산에서 부산일보 없이 지역주민 간담회를 연다고 해 보라. 독재정권도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

참여정부의 징표인 ‘청와대 인터넷 신문고’를 자랑하면서 해외동포들에게 이처럼 차갑게 대하는 정부가 과연 얼마나 신망을 얻을 수 있겠는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문민정부의 연륜이 이 정도의 소심함으로 표출된 게 한심스럽다. "미국을 혐오하고 미국에 사는 동포들도 싸잡아 싫어하는 사람들이 정권 핵심에 포진하고 있다"는 수군거림이 이번 일로 인해 하나의 믿음으로 굳어질까 염려된다.

청와대 사람들의 파워가 아무리 세다 해도 영사관이 ‘바른 간담회’를 위해 강력히 진언했어야 옳았다. 3년 정도 있다가 들어갈 처지이니 본국 실력자 눈치보는 게 자신에게 유리할지언정 상식을 외면하면서까지 ‘보신’에 얽매였다면 세계화 시대를 사는 외교관이라 하기 곤란하다. 개혁은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 청와대 비서실장이든 총영사든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했다면 자신이 개혁을 거스르고 있다는 점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박봉현 편집위원
bong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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