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중국적’ 때가 아니다

2003-05-2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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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겨스케이트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참가선수들은 물론 관중과 시청자들의 마음을 조리게 하는 대목이 바로 트리플 회전묘기이다. 세계 정상급 선수들도 중심을 잃고 빙판에 엉덩방아를 찧기 일쑤다.
평소 트리플 점프 성공률이 50%인 한 선수가 남들이 언감생심 도전하지 않는 부분에서 큰 점수를 따려고 ‘신기’에 가까운 쿼드루플 점트(4회전) 연습에 들어갔다. 하지만 번번이 얼음 바닥에 떨어져 부상만 입었다.

이 선수는 쿼드루플 점프로 시간을 보낸 까닭에 트리플 점프 연습에 소홀했고 시합 당일 쿼드루플 점프는 고사하고 트리플 점프도 실패하고 말았다.
해외한인들은 오랜 세월 바라던 이중국적 문제가 별다른 결실을 맺지 못하자 재외동포특례법이란 차선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이 법마저 위헌판결을 받아 올해 안에 폐지될 위기에 처해 있어, 한인사회는 위헌 부분을 개정해 법을 살리려고 힘쓰고 있다. 헌데 노무현 대통령이 워싱턴, 뉴욕, 샌프란시스코 동포간담회에서, 이중국적을 적극적으로 허용해야 하며 하루 빨리 장관들과 협의하겠다고 말해 한인들을 들뜨게 했다.

상당수 한인들은 과거 한국정부와 국민들이 보여 온 반응을 감안해 이중국적에 별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권익을 보장한 재외동포특례법을 받아들였고 이 법이 폐지되지 않도록 온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 노 대통령의 이중국적 추진발언이 나온 것이다. 노 대통령의 약속대로 해당 부처 장관들과 논의해 이중국적 허용 결정이 손쉽게 나온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런저런 이유로 외국국적 취득을 미루고 있는 영주권자와 시민권자의 활동영역을 넓혀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중국적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대통령의 의지가 강해도 단숨에 ‘옥동자’를 생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국내 정서도 우호적이지 않은데다 타국과의 외교적 갈등이 야기될 수 있는 까닭이다. 지금은 이중국적을 논의할 때가 아니다. 다루기 힘든 사안에 매달리다 시간을 다 보내 재외동포특례법 마저 잃게 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두 달 전 민주당 개혁파 의원과 사담을 나눈 적이 있다. 해외한인들의 역량, 이에 걸 맞는 대우 등에 대한 질문에는 찬동했다. 그런데 이중국적 얘기가 나오면서 분위기가 다소 썰렁해졌다. 이 의원은 재외동포특례법으로 해외동포들의 국내 활동에 별 지장이 없다는 수준에서 얼버무렸다. 국내 유권자들을 의식해 이중국적 논란을 회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반미감정이 팽배하고 의회는 입법활동 보다는 ‘신당 분규’로 소일하고 있다. 경제는 ‘제2의 IMF’에 비견될 정도라고 하며 ‘북한 핵’은 남북, 북미, 한미관계를 어떤 방향으로 틀어버릴지 예측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해외동포들을 돌보는 일에 과연 얼마나 긍정적인 자세로 나올 지 의문이다.

나라 밖 일도 그렇다. 소수민족에 비교적 느슨한 정책을 펴 온 중국이지만 조선족에 대한 한국국적 허용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 없다. 러시아도 비슷할 것이다. 재외동포특례법에서 혈통주의에 근거해 ‘재외동포’의 개념을 설정할 때 해방이전 이주자를 제외한 것도 중국과 러시아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물러선 것이었다. 결국 해방 이전 중국과 러시아로 이주해 간 동포들이 법의 형평성에 이의를 제기했고 대법원이 이를 수용해 위헌판결을 내리면서 동포특례법이 존폐 위기에 처한 것이다.

노 정권의 노력으로 국내 분위기가 ‘이중국적 허용’쪽으로 모아졌다고 해도 이를 강행하면 중국, 러시아와 외교적 마찰을 일으킬 공산이 십중팔구다. 경제교류와 북한에의 지렛대 역할을 위해 중국과 러시아와의 우호적인 관계유지는 노무현 정부에 긴요한 과제이므로 밀어 부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안팎의 현황은 이중국적 논의에 적절치 않다. 그리고 해외한인들의 최대 관심사인 본국 내 경제 사회활동은 재외동포특례법으로 보장될 수 있다. 이중국적 허용에 한눈 팔다가 올해를 넘기면 그나마 재외동포특례법이 사문화 된다. 의회에 개정안이 제출된 상태지만 우물우물하다 시기를 놓치면 죽도 밥도 아니다.

지금은 이중국적 허용보다는 동포특례법을 어떻게든 존속시키는 일이 화급하다. 이중국적에 대한 한국 내 논의 자체를 일부러 막을 필요는 없지만, 당위론에 얽매여 재외동포특례법 개정에 쏟아야 할 힘을 분산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시간이 별로 없다.

박 봉현 <편집위원>
bong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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