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은행 이사회, 구멍가게 주인의식 탈피해야

2003-05-0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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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최대 은행인 한미에서 행장이 ‘뒤끝이 좋지 않게’ 나간 것은 이번이 아니다. 전임자인 민수봉 행장은 임기 몇 개월을 남겨 놓고 윌셔 은행으로 ‘야반도주’했고 그 전임자인 벤자민 홍 행장은 지금도 한미 은행 이사라면 이를 갈고 있다. 한미 이사들에 대한 ‘한’이 나라 은행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는 우스개 소리까지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전임자들보다는 성격이 온순한 것으로 정평이 있는 육 행장마저 사퇴한 것을 놓고 “이사회의 등쌀이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육 행장의 공식적인 사임 이유는 “그 동안 30년 간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지쳐 한국에 나가 교편도 잡고 여행도 하고 싶다”는 것이지만 이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은행 발전을 위해 헌신하겠다”던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마음을 바꿀 리는 없기 때문이다. 지난 수개월 간 한미의 상대적 부진과 은행 경영 방침을 둘러싼 이사들과의 갈등이 진짜 원인이라는 게 정설이다.

행장과 이사회와의 다툼은 한미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80년대 후반 중앙 은행에서는 찰스 김 행장 연임 문제를 놓고 행장과 이사회가 정면 충돌, 행장 측근인 은행 직원 10여명이 집단 사표를 낸 일도 있었다. 결국 행장과 이사회의 ‘권력 투쟁’은 이사회의 승리로 끝나 김 행장이 한인 은행계를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 됐지만 그 앙금은 오래 동안 남아 중앙 은행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됐었다.


나라 은행의 전신인 미주 은행도 행장 인선을 둘러싼 이사들 간의 대립으로 문 닫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역설적이지만 그 덕에 나라는 현재 한인 은행 중 행장과 이사들 간에 말썽이 가장 없는 곳으로 꼽힌다. 벤자민 홍 행장이 들어가 혁혁한 발전을 이룩했다는 데 이론이 없고 대주주인 토머스 정씨 등이 은행 업무를 잘 모르는 데다 그 동안 주가가 수십 배 씩 뛰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승훈 신임 행장이 취임한 이 후에도 행장의 독립적인 책임 경영이 이뤄질 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리틀 홍’을 얼굴 마담으로 내세우고 뒤에서 상왕 노릇을 하려 한다”는 타운의 우려를 어떻게 불식시키느냐가 이사장 직을 맡게 될 벤자민 홍 행장의 큰 과제다.

윌셔 은행도 행장과 이사간의 말썽이 적은 편이다. 10명의 이사 중 절반이 미국인이어서 한인 은행 업무에 관여를 할래야 하기 힘들고 고석화 이사장이 전체 주식의 1/3을 쥔 대주주여서 다른 이사들은 별 발언권이 없기 때문이다. 고 이사장과의 관계만 원만하면 윌셔 은행장 하기는 비교적 쉬운 셈이다. 민수봉 행장 취임 후 4년 간 은행 규모가 4배가 늘어나는 등 급성장을 했다는 점도 행장과 이사회 사이가 좋은 이유의 하나다.

여러 한인 은행 중 한미에서 유독 행장과 이사들 간에 갈등이 심한 이유는 한미 이사들에게 개인적으로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한미의 구조적 측면에서 찾는 것이 타당하다. 한미 은행은 로컬 은행으로는 한인타운에서 가장 먼저 생겼고 가장 규모가 크다. 이 은행 이사들은 대부분 1982년 은행이 문을 열었을 때부터 은행 업무에 관여해 온 사람들이다. “자본금 수백만 달러로 시작한 이 은행을 자산 규모 15억 달러로 키운 것은 우리 공이며 은행 일이라면 우리가 행장보다 더 잘 안다”는 자부심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여러 이사 중 한 사람이 대다수 지분을 갖지 못하고 5% 정도로 나뉘어져 있는 것도 이사 간 의견 통일을 어렵게 한다. 이사장 직도 돌아가면서 하기 때문에 행장을 제외한 10명 이사 중 과반수가 전 현직 이사장이다. 지난 번 이사장 선출 때는 노광길 전 이사장이 여러 차례 이사장 직을 지냈으면서도 한번 더 하려 해 박창규 현 이사장과 치열한 표 대결을 벌여야 했다는 후문이다. 어떤 사람이 행장을 하더라도 ‘에고’와 ‘자부심’이 강한 이들 이사들의 비위를 맞추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이정현 씨가 10년 이상 이사장 직을 맡아 다른 이사의 ‘도전’이 없는 중앙 은행과는 대조적이다.

한미 은행장을 지낸 한 인사는 “이사들의 머리 속에 ‘우리가 키웠지 월급쟁이에 불과한 행장이 한 게 뭐 있어’라는 의식이 깔려 있기 때문에 겉으로 뭐라 해도 행장을 금융 전문인으로 우대하려는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한미 이사들의 행장에 대한 푸대접은 한인 금융계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벤자민 홍 행장 시절 한미 이사장이 공개석 상에서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자기 위인 행장을 큰 소리로 면박을 주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며 “홍 행장이 그런 대접을 받았으면 다른 행장들은 오죽 했을지 짐작이 간다”고 말했다. 역시 한미은행장을 지낸 또 다른 인사도 “한번은 병석에 누워 있는데 은행 이사가 찾아와 욕설을 하고 갔다”며 “‘은행 발전을 위해 힘쓴 죄밖에 없는 데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니 기가 막혔다”고 말했다.


한미 은행은 이사들이 은행돈을 헤프게 쓴다는 이유 등으로 94년부터 5년 간 관계 당국으로부터 중징계를 받은 적도 있다.

비즈니스 규모가 작을 때는 몇몇이 ‘콩 놔라 팥 놔라’하면서 책임 경영을 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규모가 커지면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 미국 대기업들이 전문 경영인을 두고 이사들은 일단 그를 임명해 책임을 맡긴 후에는 임기 끝까지 관여하지 않는 것은 오랜 경험을 통해 그 길이 장기적인 기업 발전에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인들은 전통적으로 동업에 약하다. 더군다나 민주적으로 회의를 해 타협점을 찾고 의견을 수렴하는 훈련이 전혀 돼 있지 않다. 한미 은행이 겪고 있는 내홍은 한미만의 문제가 아니라 구멍가게에서 출발해 중소기업을 거쳐 대기업으로 가는 모든 한인 업소가 치러야 할 홍역이다.

한미 은행 이사들은 “우리가 잘못한 게 뭐 있냐”며 주위의 고언에 기분 나빠할 지 모른다. 박창규 이사장은 “은행 업무를 보고 받고 감독하는 것은 이사의 고유 권한이자 의무”라며 “그것을 놓고 ‘입김이 강하다’느니 ‘월권’이니 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박 이사장은 이어 “재신임한 지 6개월 밖에 안 되는 데 사표를 반려할 생 각은 해보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본인이 딴 일을 하겠다고 나가는데 왜 말리느냐”고 답했다.

그러나 명색이 한인 최대라는 은행 행장들이 하나 같이 섭섭한 마음을 품고 옷을 벗는 것은 이사 본인은 물론 은행 이미지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한미 은행 이사들은 이번 육 행장 사임을 계기로 스스로의 마음가짐과 언행이 과연 은행 발전을 위해 최선이었는가를 한번 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민 경훈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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