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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트 에일리언

2003-05-0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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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입학 시험장에서 시험관이 “커닝하다 들키면 퇴장”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시험이 시작된 후 3명이 커닝하다 적발됐다. 수험생 A는 이 대학 교수의 아들이다. 수험생 B는 보통 학생이다. 수험생 C는 거액에 매수돼 대리로 시험을 치르는 불법 응시자였다.

시험관은 커닝한 진짜 수험생 A, B와 가짜 수험생 C를 처벌해야 했다. 시험관은 수험생 A의 아버지가 같은 대학 교수인 점을 고려해, 그가 대학을 사랑하고 존중해 더 이상 커닝을 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다음 과목들을 모두 응시할 수 있도록 관용을 베풀었다. 그러나 수험생 B, C는 ‘믿을 수 없는 놈들’로 단정해 다른 과목 시험을 보지 못하게 했다.

수험생 C는 가짜이므로 애당초 시험에 응시할 수 없고 커닝으로 신분이 탄로 났기 때문에 계속 시험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수험생 B는 수험생 A와 마찬가지로 진짜이고 동일한 잘못을 저질렀는데 A와는 ‘천양지차’의 벌을, 가짜인 C와는 동일한 벌을 받았다.


진짜 수험생 B에게는 수험생 A에게 적용됐던 대로 커닝 사실만이 문제가 돼야 한다. 다른 시험까지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다. 출발부터 부정한 방법을 동원한 수험생 C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수험생 A는 믿을 수 있고 수험생 B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은 편견이다. 진짜인 수험생 A와 수험생 B가 다른 과목에서 커닝을 할 개연성은 동일하다. 수험생 A는 다시 커닝을 하지 않을 것으로, 수험생 B는 다시 커닝할 것으로 예단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지난해 타계한 20세기 철학의 거목 존 롤스 하버드대 교수는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에서 사회구성원은 기본적인 자유를 평등하게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사상계에서 그 보편성을 인정받고 있는 롤스의 이론을 유추 해석하면, 합법적인 절차를 준수하면서 미국생활을 시작한 영주권자(레지던트 에일리언)도 시민권자와 같이 사회구성원으로서 기본적 자유를 누리는 게 마땅하다.

연방대법원이 찬성 5표 반대 4표로 “추방대상 영주권자를 추방 전까지 보석 없이 구금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영주권자가 가게에서 담배 4갑과 감기약 한 병을 훔쳤다 해도 유죄가 인정돼 1년 이상의 실형이 선고될 경우 추방될 때까지 보석 없이 무기한 구금될 수 있게 됐다.

“무기한 구금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반론이 범죄행위를 두둔하는 것으로 오해돼선 안 된다. 추방 전까지는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점을 제기하려는 것이다. 재범이나 도주 우려 때문이라고 하지만 영주권자는 이름 그대로 영주를 목적으로 한다. 이번 판결에서 소수의견을 낸 데이빗 수터 대법관의 논지대로 ‘무기한 구금’은 오랜 세월 합법 이민자에게 부여해온 인신구속으로부터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다.

이번 판결로 많은 추방대상 영주권자들이 도주의 위험이 없는데도 무기한 구금될 것이다. ‘위험 인물’을 솎아낸다는 명분이 공정한 절차를 내팽개쳐서는 곤란하다. 극악무도하고 명명백백한 살인범을 사형시키는 데도 얼마나 절차가 까다로운가. 미국이 그토록 강조하는 법치주의는 인권을 중시하는 법적 절차를 존중하는 데서만 떠받쳐지는 법이다.

동일한 범죄에 대해 시민권자와 영주권자에 상이한 기본권을 적용하는 것은 법 적용 시 무게 중심을 ‘법치’보다는 ‘신분’에 둔 결과이며 진정한 문명사회에 걸맞지 않은 양태이다. 시민권자가 영주권자보다 미국에 대해 더 애착을 갖고 애국적일 수는 있다. 투표도 해야 하고 성가신 배심원도 감수해야 한다. 설령 그렇다 해도 애국의 정도가 법 적용의 차별을 합리화한다면 법의 논리보다는 정치적 레토릭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로 폄하될 수 있다.

내심 “억울하면 시민권을 따라”고 몰아세우려 한다면 합법적인 선택의 자유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미국정신에 침을 뱉는 것이다.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을 겪으면서 사회 전반에 배타적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미국은 ‘열린 사회’로 남아 세계 모든 사회에 롤 모델이 돼야 한다. 미국이 강한 자부심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껴야 할 대목이다. 영주권자도 사회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살고 있음을 인정하는 자세가 그 출발이다.

박 봉 현 <편집위원>
bong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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