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3-04-30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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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밤의 이민 100주년 할리웃 보울 대축제는 정말 즐거웠다.
사람들 북적이는 곳은 딱 질색인데다 출연가수중 아는 이름이라곤 패티 김 하나밖에 없던 나도 장장 네시간여의 공연을 맘껏 즐겼으니,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신나고 감격스러웠을까.

가수들의 공연도 모두 완벽했지만 사람이 그렇게나 많이 모였는데도 작은 불평, 사고 한 건 없이,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었던 행사 진행이 돋보여 정말 자랑스러웠다. 2003년 4월26일은 한인 이민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 날로 기억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그날은 또한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샌드위치를 가장 많이 싼 날로도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할리웃보울 대축제를 맞이하여 무슨 도시락을 준비할까 생각하던 나는 최근 나의 히트작으로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는 치킨 샌드위치를 만들기로 했다. 사실 이 치킨 샌드위치는 풀러튼의 요리전문가 이예숙씨의 레서피인데, 만들 때마다 사람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갈채가 쏟아지는 바람에 요즘 내가 비장의 18번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내 식으로 간단하게 변형한 레서피를 소개하면, 미국마켓 델리부에서 파는 구운 통닭을 사다가 껍질을 벗기고 살을 발라낸다.(가격이 6.99~7.99달러쯤 하는 이 통닭은 뜨끈뜨끈 할 때 그냥 먹어도 훌륭한 식사가 되지만 살만 찢어서 각종 야채와 섞어내면 맛있는 치킨 샐러드가 된다) 이 닭살과 함께 약간의 양파, 셀러리를 모두 잘게 다지고 아몬드(sliced) 서너숟갈을 마른 팬에 살짝 볶아 식힌다. 마요네즈 5큰술에 머스타드·꿀·레몬즙을 1큰술씩 모두 섞어 걸죽한 소스를 만든 다음 치킨, 양파, 셀러리, 아몬드에 넣고 다 함께 버무린다. 이 치킨 혼합물을 버터 바른 식빵 두장 사이에 얇게 펴 넣은 후 가장자리를 칼로 잘라내고 4등분하면 치킨 샌드위치가 되는 것이다.

그날 할리웃 보울에서 여기저기 아는 사람들 만날 것을 대비해 좀 넉넉히 만들어갈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식빵 두 줄을 모조리 싸야할 만큼 늘어날 줄은 나도 몰랐다. 치킨 샌드위치를 싸겠다고 하니까 친구들이 갑자기 나의 좌석번호를 자세히 물어보며 꼭 찾아가겠다고 했을 때부터 좀 불안하긴 했었다.

그래 이왕 하는거, 이럴 때 선심이나 쓰자 하고 통닭 한 마리를 뜯기 시작하는데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타주 출장중이어서 갈지 말지 확실치 않던 딸이 지금 막 공항에 도착했으니 할리웃 보울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아! 언니와 조카애가 경황없이 올테니 좀 더 싸야겠구나, 하면서 양파와 셀러리를 더 다지고 있는데 바로 연이어 동생이 전화를 했다.

“언니, 김밥을 사갈려구 했는데 한인타운에 마켓이란 마켓은 모두 김밥이 동이 났어. 갑자기 어떡하지?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이라도 좀 사가야 할까봐” 오! 동생 것도 하나 더 싸야겠네, 하며 분주히 부엌에서 움직이는데 또 전화벨이 울린다.

이번에는 후배뻘 되는 또 다른 친구.
“언니! 갑자기 표가 생겨서 나도 가게됐어요. 근데 뭘 준비해야되죠? 난 그냥 맨몸인데...”

이리하여 우리 세식구에 언니 식구, 동생 식구, 친구들 것까지 여러 팀을 챙기느라 나는 막판에 미친 듯이 치킨 샌드위치를 만들어 대었다. 나중에는 누가 누구 것인지 내 머리로는 기억도 잘 안되어 일회용 컨테이너를 잔뜩 쌓아놓고 샌드위치를 6개씩 담은 후 뚜껑에 매직펜으로 사람 이름을 써넣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내가 부엌에서 이 난리를 치는 동안 남편과 아들도 조용히, 그러나 분주하게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어느 틈에 사왔는지 포테이토 칩에 강냉이과자, 뻥튀기에 캔디, 껌, 비프저키까지 한 짐을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그뿐인가. 아이스박스에 각종 음료수, 와인, 커피 보온병도 두 개나 넣었지, 추울까봐 담요 2개와 각자 스키용 파카까지 챙겼더니 우리는 마치 피난민 같은 행색이 되고 말았다. 그것도 내가 창피하다고 화를 내어 웬만큼 빼낸 것이 그 정도였으니 그냥 두었으면 사람들은 우리가 캠핑이라도 하려는 줄 알았을 것이다.

가방 하나 가득 싸간 샌드위치를 여기 저기 딜리버리 하면서 돌아보니 가장 많이들 싸온 것이 김밥, 닭다리, 샌드위치들. 그런데 음식 만든 사람은 못 먹는다고, 한참 설치고 다녔던 나는 따끈한 커피가 그저 최고였다. 떠들고 박수치고 실컷 놀다가 ‘대~한민국’과 불꽃놀이에 환호성을 지르고 돌아오는 길. 갈때완 달리 손이 무척 가볍다. 가져간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처리하고 돌아온 부자의 실력 덕분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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