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텔레비전 없이 산다

2003-04-2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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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이 끝났다. 이라크가 안정을 찾고 나라를 재건하기까지는 아직도 할 일이 많지만 최소한 전투는 끝났다.
뉴스광인 나는 마치 나방이가 불꽃을 향하듯이 전쟁뉴스에 관심을 쏟는다. 하루에 세 번씩 뉴스를 체크한다.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서 제일먼저 하는 것이 라디오를 켜는 일이다. 오후에는 NPR라디오 방송프로그램인 짐 레어의 ‘뉴스 시간’(The News Hour)을 듣는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밤 10시 뉴스를 듣는다.
우리 집에는 케이블 텔레비전이 없다. 우리동네는 근처에 산들이 많아서 텔레비전 방송이 나오질 않아 이라크 전쟁장면을 영상으로 보질 못하였다. 요즘 세상에 텔레비전 없이 산다는 사실이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쇼크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에게는 텔레비전이 마치 산소와 같기도 하니까 말이다.

나 역시 텔레비전과 함께 자랐다. 텔레비전은 항상 친한 친구처럼 나의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거의 하루 4시간 정도 텔레비전을 보았다. 성인이 되어서 텔레비전 시청시간을 줄이기는 하였지만 텔레비전은 나의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게을러서 아무 것도 하기 싫을 때,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그래도 무엇인가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 아들이 몇 년 전에 집을 떠났을 때, 우리는 케이블 TV 서비스를 중단시켰다. 돈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한 달에 40달러를 절약하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사회생활과 영적 생활이 TV로 인해 방해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 몇 시간씩 텔레비전 스크린이 뿜어 내는 최면에 걸려, 일주일에 수십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 버리는 것이 아까웠다. TV를 없앤 후 우리 부부에게는 책 읽을 시간과 공부할 시간이 더 많아졌다. 친지들과의 친교생활도 나아졌다고 나는 믿는다. ‘백만장자’나 ‘친구’와 같은 TV 연속극을 보지 않아 손해 보았다고 생각 한 적이 한번도 없다.

하지만 텔레비전이 있었으면 하고 아쉬워 해본 적이 몇 번 있다.
9.11 사건 때와 이라크 전쟁 때이다. 아마 나는 미국 사람 중에 747 비행기가 무역센터 건물과 충돌하는 그 영상 장면을 보지 못한 소수의 사람 중에 한사람일 것이다.
이번 이라크 전쟁이 일어났을 때 나는 다시 한번 아쉬움을 가졌다. NPR 라디오 뉴스가 전쟁터 소리를 전하여 주었고, 구독하고 있는 몇 개의 신문들이 글로 전쟁장면을 설명하여 주었지만 그래도 TV만이 전하여 줄 수 있는 영상 이미지와는 달랐다. 집에 TV가 있었다면 끝임 없이 재방송하는 CNN의 전투와 약탈 장면에 말려들어 많은 시간을 TV 앞에서 소비하였을 것이다.
지난주에 함께 일하는 동료가 피곤하다면서 툴툴거렸다. FOX 뉴스를 밤늦게 까지 보다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뉴스이미지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토로하였다. 나도 분명 동료와 똑 같은 처지였을 것이다.


TV가 없어 후회하여 본적은 없는데, 4월9일에 바그다드에서 일어났던 한 장면을 보지 못한 것만은 무척 아쉽다. 미국 해병대가 사담 동상을 끌어 내렸을 때 바그다드 시민들이 환성 하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다. 이라크사람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신문과 인터넷에서 보았지만 동상을 무너뜨리는 장면을 영상이미지로 보지 못하였다.
4월9일 바그다드가 무너진 후에 북한 정부는 미국정부와 대화를 나누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였다. 분명 김정일은 날마다 이라크 전쟁뉴스를 TV를 통해서 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라크 전역에 서있는 사담 동상이 끌려 내려지는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깨어진 사담동상의 목을 밧줄로 묶어서 끌고 다니는 장면을 보면서 김정일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궁금하다. 북한 방방곡곡에 세워져 있는 자기 아버지의 동상을 생각지 않았을까?
언젠가 북한에 세워져 있는 수많은 김일성 동상들이 무너져 내리는 장면을 환호하며 기뻐하는 평양시민들의 모습을 보는 그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나는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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