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보다 무척 행복했던 시절이었던 9세기의 바그다드에는 수크 알 와라킨이라는 문방구 상가가 있었다.
이 일대에만 100개가 넘는 제지 상점이 성업 중이었다. 당시 바그다드는 제지업의 중심지였으며 그 품질도 최상이었다. 비잔틴 제국에서는 아예 종이를 ‘바그다틱손’이라고 불렀다. 바그다드 시 통치자의 이름을 따 탈리니 누히니 타히리니 하는 여러 종류의 종이가 사용됐다. 당시로서는 최신 제품이었던 종이에 관한 한 아랍인들이 가장 뛰어났다.
이라크 전 이후 회교도 근본주의자들은 서양 문물과 다시는 화해를 시도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중도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금 이보다 시급한 과제는 없다.
근본주의자들은 바그다드의 ‘황금 시대’에 대해 이야기하기 좋아한다. 어떻게 하면 이런 시대가 다시 돌아 올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막연히 이를 동경하고 있는 것이다.
사담은 몰락하기 전에는 바그다드를 건설한 칼리프 알 만수르에 비견되곤 했다. 사담이 만든 시 사냥 클럽은 9~10 세기 경 비단 머리 장식으로 주로 꾸며졌다. 현재를 과거와 연결시키려고 한 아랍 광신도에는 오사마 빈 라덴도 포함된다. 그는 1981년 사다드 대통령을 암살한 이집트 과격 집단 창설자인 사이드 쿠트브의 계승자다. 쿠트브는 14세기 몽골의 침략으로 바그다드에서 도주한 회교 성직자 이븐 타이미야의 유지를 이어받고 있다.
그러나 회교의 황금 시대는 근본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종이를 보자. 종이는 기원 1세기 경 중국이 발명한 것이다. 그것이 751년 타시켄트 인근에서 벌어진 탈라스 전투에서 잡힌 중국 포로를 통해 중동으로 흘러 들어갔거나 그보다 훨씬 전 비단길을 따라 전해진 것이다. 9세기 당시 아랍에서는 종이가 워낙 흔해 일부 학교에서는 이를 거저 나눠주기도 했다. 이것이 교육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당시 바그다드는 도쿄처럼 외국 문물을 받아들여 이를 변형시키는데 뛰어났다. 병원이란 개념은 6세기 경에는 이미 페르샤에서 발명한 것이지만 바그다드는 이를 도입해 널리 보급했다. 내과, 정신과 등 직종을 전문화했을 뿐 아니라 야전 병원까지 만들었다.
수학도 마찬가지다. 8세기말 인도 상인들이 아랍에 대수와 지금 아라비아 숫자로 불리고 있는 인도 숫자를 소개했다. 0의 개념도 인도인들이 먼저 발명한 것이나 아랍인에 의해 일반화 됐다. 제로라는 단어의 기원은 따지고 보면 ‘제피룸’이라는 아랍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 철학자들을 연구해 유럽에 전파한 것도 아랍인들이다. 이런 역사의 포인트는 아랍 근본주의자들이 말하는 바그다드의 황금 시대는 외국 문물에 문호를 개방했을 때 열렸다는 점이다. 그리스와 인도, 중국의 문서를 번역한 이들은 기독교도와 유태인, 이교도들이었다.
9~10세기 경 서방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지만 아랍이 이를 가능케 한 정신적 환경을 마련해줬다고 말할 수 있다. 많은 그리스의 고전은 스페인 회교권에 속했던 톨레도를 통해 유럽에 전파 됐다.
다시 말해 아랍은 유럽을 두려워할 필요도 무시할 필요도 없다. 아랍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번영은 폐쇄적인 근본주의가 아니라 개방과 수용성과 외부에 대한 호기심에서 온다는 사실이다.
피터 왓슨/ 뉴욕타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