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속돌’ 경계

2003-04-2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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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에서 돌에 비유되면 자존심이 상하거나 창피한 것이 보통이다. 수영을 전혀 못한다는 빈정거림이기 때문이다. 손톱크기 만한 조약돌도 물 속에 들어가면 다시 떠오르지 않는다. 살인범이 완전범죄를 꾀할 때 시신을 돌에 밧줄로 묶어 물 속에 잠기게 하는 것도 한번 들어가면 다시 부상하지 않는다는 믿음에 연유한다.

돌이 크기에 상관없이 물에 가라앉는다는 것은 상식이고 과학적으로도 ‘정설’에 속하지만 이것도 ‘예외 없는 법칙’은 아닌 모양이다. 그랜드캐년의 동남쪽 70마일, 세도나의 동북쪽 40마일 지점에 가면 ‘속돌’(Pumice)이라고 명명된 진기한 돌을 대할 수 있다. 속돌은 약 900년 전 폭발한 화산이 고스란히 보존된 애리조나의 ‘선셋 분화구 유적지’의 명물 중 하나다.
이 유적지 소형 박물관에 안치된 수십 종의 돌 가운데 유독 속돌만이 물찬 유리컵 안에 들어있다. 헌데 손바닥 반 만한 크기의 이 속돌은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았다. 유리컵 물밑에 가라앉아 있어야 할 돌이 둥둥 떠 있는 것이다. “직접 만져 보라”는 안내문대로 돌을 물밑까지 밀어 넣은 뒤 손을 떼면 “숨이 막혀 못 견디겠다”는 듯 수면 위로 치켜 올랐다. 물에 뜬다고 해서 부석, 가볍다고 해서 경석 등으로 불리는 속돌은 분명 ‘튀는 돌’이었다.

용암이 분출한 뒤 압력이 급격히 줄면서 휘발성분이 대기로 빠져나간 채로 신속하게 굳어지는 바람에 구멍이 많이 났고, 광물질로 응집할 겨를이 없이 응고돼 외관으로는 어엿한 돌이지만 들어보면 ‘속 빈 돌’처럼 가벼운 존재다. 유리질로 형성돼 번들번들한 속돌은 가볍다는 특성으로 정원 장식용으로, 열에 강해 지붕과 같이 화재 방지용 건축 자재로 사용되는 등 요모조모 쓰임새가 있긴 하지만 아무튼 ‘돌다운 돌’은 아니다.
유별나 보이는 게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여러 인종이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미국사회에서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소수계라 해서 의기소침할 이유는 없지만 ‘우리’를 드세게 유세하려 한다면 밉살스러울 뿐이다. ‘속돌의 메시지’는 약 1만8,000명의 한인이 한자리에 모일 할리웃 보울 음악축제에 즈음해 한결 강한 톤으로 울려온다.


이번 축제는 터키와의 월드컵 4강전 응원을 위해 LA다운타운 스테이플스 센터에 1만8,000여명이 모였을 당시의 열기를 토해낼 공산이 크다. 경기 때마다 한인들이 붉은 티셔츠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다녀도, 대로에서 한인차량들이 한국팀의 승전을 축하하는 경적을 요란하게 울려도, 주류방송의 취재 카메라 앞에서 ‘대한민국’을 외쳐대도 책잡힐 일은 아니었다. 지구촌 축제과정에서 얼마든지 생길 수 있는 현상인 까닭이다.
그러나 순수한 커뮤니티 행사인 이번 음악축제는 다르다. 누구에 의해서든 자발적이든 한국, 한국인임을 부각시키는 연호나 단체행동이 돌출한다면 괜스레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다. 민족 동질성을 불지펴 느슨해진 소속감을 꽉 조일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다.

테러, 전쟁으로 이어지는 시국은 사회 전체의 동질성 강화를 최우선 목표로 삼게 한다. 특정 인종의 동아리 의식을 내세울 때가 아니다. 검정, 빨강, 하양, 회색 등 색깔은 달라도 돌들처럼 물 속에 침잠해있어야지 속돌처럼 저 혼자 물위로 튀어 올라서서는 곤란하다. 북한 핵 문제로 한민족을 바라보는 미국인의 시선이 부드럽지 않은 현실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연전에 캘리포니아에서 불법체류자의 권익을 대폭 제한하는 ‘주민발의안 187’이 주민투표에 회부됐을 때 멕시코 주민들이 LA타운타운에서 멕시코 국기를 펴들고는 이 발의안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인 적이 있었다. 성조기 대신 멕시코 국기를 흔들며 벌인 인권보호 시위는 멕시코 커뮤니티 내에서도 빈축을 샀었다. 아무리 숭고한 명분이라도 행동에 옮길 때 전후좌우를 살피는 것은 소심함이 아니라 신중함이다.

사회적응은 우리 이민자들에겐 지상과제이다. 작금의 상황은 ‘한민족으로서의 한인’보다는 ‘미국사회 일원으로서의 한인’이란 자세를 요구한다. 이번 축제에서 고단한 이민생활의 스트레스를 용암처럼 뿜어내더라도 너무 황급히 식어버려 다른 돌처럼 물에 가라앉지 못하는 속돌이 되지 않도록 마음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음악축제가 불어 넣어주려는 이민생활의 활력소를 듬뿍 섭취할 수 있을 것이다.

박 봉 현 <편집위원>
bong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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