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대통령의 눈물

2003-04-09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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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에선 불안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 공연히 가슴이 뛰고 무슨 변이라도 일어나는 게 아닌가 하는 공포심이 퍼져있다. 나이 든 이들은 시국, 젊은이들은 취직 걱정 등 장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고 한다. 하기야 이런 현상은 한국에서만 감지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전쟁 이후 세계 곳곳에 유사한 공포심과 불안이 깔려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한데 한국에서 느끼는 불안은 좀 특별나다. 이라크 전쟁이 미국 승리로 조기 종결돼도 그 불안은 여전할 것 같다. 따지고 보면 그 불안 요인이 다른데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 전쟁이 막을 내리면 필시 북한 핵문제가 부시의 다음 타겟이 될 게 분명한데 한-미간 공조는 잘 될지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정치적으로는 여야간 대립이 여전히 각을 세우고 있다. 이라크 전쟁 파견을 둘러싸고 노조단체와 대학생들의 공세로 국회마저 움츠리고 ‘춘투’라는 고질병이 경제 발목을 잡고 있다. 이로 인해 경제지표는 연일 하향곡선을 긋는다. 초등학교 교장이 교원 노조원의 핍박에 목을 매 자살한 기막힌 일도 벌어졌다. 지금 한국은 ‘노조 천하’다. 선생도 공무원도 머리띠를 두르는 나라다. “세상이 어찌되려고 이 모양이냐”는 태산같은 걱정 속에 집권세력에 대한 불신과 불안은 날로 높아가고 있다. 나이가 들었거나 젊거나 이민을 가고 싶다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음은 사회적 불안감을 확인하는 증거다.


한국은 ‘노조 천하’

그 연장선에서 우리의 조국애를 가늠하는 서글픈 통계가 나왔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남자 대학생 10명 중 8명은 전쟁이 나도 군대에 가지 않고 외국으로 나갈 생각이라고 응답했다. 또 유학중인 한국 학생 10명 중 1명만이 조국에 전쟁이 나면 귀국해서 총을 잡겠다는 기막힌 조사도 나온 바 있다. 이스라엘 학생들의 98%가 조국 전선에 기꺼이 참가하겠다고 한 것과 너무나 대조를 이룬다. 바로 이들이 사이버라는 무기를 들고 이 나라 선거판을 좌지우지한 뉴 파워다.

노조, 대학생, 진보-좌파 세력, 그들은 대체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우군이다. 파병 동의안을 놓고 노조단체가 극렬하게 반대하자 노 대통령은 노조대표들을 청와대로 불러 다독거렸다. 또 KBS 사장임명에 반대한 노조대표도 청와대로 불러들였다. 이를 두고 “대통령이 노사 협상에 나선 나라는 천하에 한국밖에 없다”는 조롱 섞인 말도 나돌고 있다.

한국인들처럼 정치에 민감한 민족도 드물다. 사회의 모든 분야의 출발점과 종착점은 정치다. 정치를 빼면 한국인의 일상은 무료하기 짝이 없다. 눈뜨면 정치 이야기요, 한잔 할 때도 대통령 이야기가 빠지면 재미가 없다. 국력은 정치로 집합하고 그 정점에 대통령이 군림한다. 젊고 격식 차리지 않는 ‘서민 대통령’이 나왔다고 박수를 친 게 엊그제인데 바로 그 대통령 말 한마디에 나라가 들썩이는 걸 보니 권력의 힘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모양이다.

여기서 의문은 제기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과 다른 구석이 많다. 군 출신 대통령들과는 생태적으로 다르고 민주화를 부르짖던 김영삼, 김대중씨와도 다르다. 가신을 거느리고 지역 맹주를 만끽한 그들보다 훨씬 덜 권위적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의 브랜드는 ‘파격’이다. 전통적인 것, 타성적인 것, 방어적인 것을 깨부수는 파격이 진행 중이다.

신문과는 전쟁, 방송과는 밀월

한데 ‘노무현식 파격’이 문제되는 것은 ‘격’을 지켜야할 것도 부수는데 있다. 대통령으로서의 처신이 그 중 하나다. 국가 최고 통치자에게 국민들은 많은 덕목을 요구한다. 그걸 모두 구비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흔히 대통령은 ‘대통령다워야 한다’는 막연한 말로 대신한다. 노 대통령은 지금 이 대목에서 많은 이들의 머리를 갸우뚱하게 만들고 있다. 서글서글하고 격식을 따지지 않는 서민적 풍모는 마음에 들지만 대통령으로서의 공적인 언행에는 입맛을 다시는 이가 많다. 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해 ‘차려와 쉬어’라는 구호를 제도로 하지 못해 생도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애교로 치부해도 좋다. 하지만 그 ‘대통령다워야 한다’는 평이한 바람을 접어야하는 경우가 자주 눈에 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위에서 지적한 노조와의 면담만이 아니다. 언론과의 전쟁이라는 무서운 말을 쏟아낸 가운데, 특정 신문을 찾아가고 “방송에 신세졌다”고 자신을 지지한 TV에는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동티모르에 파병됐다 ‘안전사고’로 순직한 장병 유족들을 만난 자리에선 불현듯 눈물을 흘렸다. 물론 유족들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다는 인간적인 순수성을 평가할 수는 있다. 하지만 국가 통치자가 눈물을 보인다는 건 달리 생각할 문제라고 말하는 이가 많다. 눈물을 보이는 대신 유족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언행이 더 바람직하다는 견해들이다.

미 민주당의 개혁 기수로서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던 조지 맥거번이 기자회견 때 가족문제를 물고늘어진 기자들 질문에 그만 울음을 터뜨린 적이 있었다. 미국 여론은 “저렇게 여린 감정으로 어떻게 국가를 통치해 나갈 수 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 결국 지명전을 포기하고 도중하차했다.

노 대통령이 대선 때 같은 모습을 보였다면 우리 유권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인간적이다”라고 젊은이들은 오히려 환호했을 것이다. 감성이 지배하는 나라-그 곳이 한국이다.

안영모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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