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와인 이야기 오래된 적포도주 2~3일 세워 가라앉게

2003-02-2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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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전물 다른 병으로 옮겨담는 디캔딩

짧은 시간 공기와 접촉시켜
부드럽고 달콤한 맛 끌어내

장기 보관한 것 옮겨 담은후
1시간이내 마시는게 좋아


한국 TV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고급 레스토랑에서 남녀가 분위기 잡으면서 식사할 때 자주 와인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레스토랑이 매우 비싼 곳일수록 와인을 손잡이가 달린 조그만 바구니에 비스듬히 눕혀서 가져다주는 것을 본다. 이 바구니는 파니에 (panier)라고 하는데, 오래된 와인에 생긴 침전물이 병의 안쪽 벽을 타고 바닥으로 쉽게 가라앉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파니에가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오래된 와인이라는 것을 알리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아마도 자주 쓰이는 것 같다.

침전물은 와인 속의 색소 성분과 다른 여러 성분의 결정체로, 카버네 소비뇽과 같이 색이 진한 적포도주가 숙성하면서 병 안에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침전물이 있다는 것은 한 때 진하고 풍요로운 색을 지니고 있었으며 각종 성분이 가득한 고급 적포도주라는 것을 증명하기도 한다. 와인의 침전물은 몸에 전혀 해롭지 않지만 한국적 정서로 보자면 찌꺼기로 인식되어 모두 따라버리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와인 애호가들 중에는 이것을 와인이 개봉 전까지 병 속에서 뱉어낸 마지막 탄식이라며 버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오래된 적포도주 병 속에 생성된 침전물을 병 바닥으로 가라앉힌 후 다른 병으로 옮겨 담는 것을 디캔팅(decanting)이라고 하며, 옮겨 담는 병을 디캔터 (decanter)라고 한다. 10년 이상 보관하고 있던 적포도주를 마실 때는 그 전의 2~3일 동안 병을 세워두고 침전물이 병 바닥으로 가라앉게 해야 한다. 바닥에 침전물이 다 가라앉은 후 병이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코르크 마개를 따고 준비된 디캔터로 침전물이 따라 들어가지 않도록 조금씩 옮겨 담으면 된다.

이 때 침전물이 따라 들어가는지를 잘 보기 위하여 와인 병의 목 부분 밑에 촛불을 켜 두기도 한다. 회중 전등으로 비추어도 보이지만 촛불이 훨씬 더 분위기를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와인이 병 바닥으로부터 약 2인치 정도 남았을 때 침전물이 와인의 목 부분까지 따라 나오면 디캔팅을 멈추고 디캔터로 옮겨진 맑은 빛깔의 와인을 마시면 된다.

침전물이 충분히 바닥에 가라앉지 않은 병을 디캔팅할 경우 와인이 반 이상이나 남았는데도 침전물이 따라 나오려고 할 수 있다. 이때는 커피 필터와 깔대기를 이용하여 디캔팅 하면 된다.

디캔터는 와인을 옮겨 담기 쉽도록 입구가 약간 넓고, 목이 좁으며, 아랫부분이 넓다. 이는 좀 더 넓은 면적이 공기와 접촉해 충분히 숨을 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고안된 디자인이다. 와인은 공기와 접촉을 하면서 부드러워지고 달콤해지면서 훌륭한 맛을 낼 수 있으므로, 디캔터의 또 하나의 역할은 좀 더 짧은 시간 안에 좀 더 많은 양의 와인을 공기와 접촉시켜서 풍부하고 부드러운 맛을 끌어내는 것이다.


와인을 공기와 접촉시키기 위해 디캔터에 옮겨 담는 과정은 에어레이팅(aerating)이라고 한다. 디캔팅의 목적이 침전물을 분리하는 것이라면 에어레이팅의 목적은 와인의 떫은 맛을 약하게 하고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을 좀 더 풍부하게 부각시키도록 하는 것이다. 와인은 디캔터로 옮겨지는 동안 공기와 접촉하게 되고, 디캔터 속에서 넓은 면적이 한꺼번에 공기와 접촉하게 되므로 와인이 충분히 숨을 쉬는 결과를 가져온다.

오래된 와인뿐만 아니라 덜 숙성하여 떫은 맛이 강한 어린 와인들도 에어레이팅을 하면 마치 어느 정도 숙성시킨 것처럼 부드러운 맛을 낼 수가 있다. 어린 와인의 경우 디캔터에 옮겨진 후 15~20분 후에 마시면 훨씬 부드럽게 느껴질 수 있고 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에어레이팅 필터를 사용하면 와인이 디캔터로 옮겨지는 동안 더 많은 공기와 접촉하게 된다.

보통 이런 효과를 내기 위해 와인 병을 개봉한 후 20~30분 혹은 1시간 후에 마시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사실 별로 큰 효과가 없다. 와인의 목 부분이 워낙 좁기 때문에 그 정도 작은 면적의 와인이 공기와 얼마동안 접촉한다고 해서 맛이 크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와인을 처음 개봉했을 때 약 반 잔 정도 따라내고 와인이 병의 어깨부분 약간 밑까지 내려오도록 한 후 20~30분 기다린다면 좋을 것이다.

모든 와인이 디캔팅과 에어레이팅을 거쳐서 맛과 빛깔이 더 훌륭해지는 것은 아니다. 와인은 마치 사람과 같아서 매우 오래된 와인은 그 상태를 가늠하기가 힘들다. 그러므로 불필요한 에어레이팅과 디캔팅을 통해서 오히려 함유된 깊은 맛과 향을 잃고 싱거워질 수도 있고, 절정기를 조금 지난 와인의 경우 종말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정해진 룰은 없지만, 대개의 경우 처음 만들어졌을 때 색이 진하고 타닌이 많이 함유된 카버네 소비뇽, 보르도산 적포도주, 바롤로 등을 에어레이팅하면 효과가 있고, 오래된 와인은 디캔팅한 후 1시간 내에 마셔야 한다. 그와 반대로 색이 진하지 않고 타닌이 적게 함유된 피노 누와, 부르고뉴산 적포도주, 리오하, 키안티 등은 디캔터에 옮길 경우 강한 과일향을 많이 잃고 밋밋한 맛의 와인으로 변할 수 있다.

와인을 디캔팅하는 것은 어린 와인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고, 오래된 와인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에어레이팅을 거쳐서 부드럽고 풍요로워진 맛과 향의 와인을 마시는 것은 극장에 영화를 보러가서 광고와 예고편, 그리고 영화 시작 부분의 테마 음악이 나오는 부분을 모두 생략한 채 본 내용만을 보고 나오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와인이 가진 모든 것, 처음 개봉되었을 때의 톡 쏘는 떫은 맛, 중간에 점점 풍요롭게 변해가는 향, 훨씬 더 시간이 지난 후 부드럽고 달콤하게 느껴지는 맛, 오랜 시간 병 속에서 와인이 뱉어낸 마지막 탄식 침전물까지 있는 그대로 다 느껴보는 것이야말로 와인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최선명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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