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노무현 정권과 주한미군

2003-02-2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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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월25일, 한국엔 매우 ‘유별 난’ 집권자가 탄생했다. 여기서 유별나다는 뜻을 굳이 영어로 바꾸자면 ‘Unusual’이란 단어가 적절할 것이다. 이미 다 아는 대로 노무현 대통령은 대학을 다니지 않았다. 자신의 말을 빌리면, 깡촌에서 태어나 궁핍하게 자랐고, 정규교육도 받는 둥 마는 둥 좀 유별 난 청년이었다. 검정고시로 자격증을 따고 고시에 합격해 변호사, 국회의원, 장관을 거쳐 일약 국가수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이 50대의 젊은 대통령의 출현을 놓고 한국에선 그 어느 때보다 찬·반 기류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분명 오늘의 노무현을 탄생시킨 주력부대인 영 파워, 이념적으로는 진보-좌파 그룹, 지역적으로는 호남으로부턴 환호의 말들이 쏟아졌다. 반면 노무현이란 인물에 선뜻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들 입에선 한숨 섞인 노성이 흘러나오고 있다. 올드 제너레이션, 전쟁을 일으킨 북한 정권을 경계하고, 한국의 페이트론인 미국에 감사하고, 철딱서니 없는 패기보단 산전수전 다 겪은 경험을 존중하는 보수세력이 그들이다.

이 나라 노병들은 왜 광장에 모이고 있는가


어느 정권이 들어서건 지지와 반대가 공존하는 법이지만 이번만큼 그 대립각이 날카로운 적은 일찍이 없었다. 학자들은 그 이유에 대해 전전세대가 물러나고 전후세대가 국가 경영 축으로 들어서는 과정에서 드러난 불가피한 사회현상으로 설명한다. 물론 그런 측면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학문적 해석만으론 충분치 않은 무언가가 존재한다.

이젠 후선에 물러나 젊은이들을 격려할 법도 한 노병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침묵은 죄악이다’라고 외치면서 탑골공원으로, 광화문 광장으로 내닫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거기에 오늘날 한국의 문제가 존재한다. 그들 입에서 “이대로 놔 둘 순 없다”고 외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노 정권의 대북한, 대미국정책에 대한 불안과 불만이다. DJ정권 하에서 강행된 햇볕정책과 한-미간의 불화 야기가 새 정권에 들어서서 개선될 기미가 전혀 없다는 우려가 노병들 발길을 현장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김정일 정권에 건넨 현금 전달이 ‘법에 잘못된 것’임을 DJ 스스로 밝혔건만 검찰은 그 내막 수사를 못하겠다고 나자빠지고, 그러면 특검제로 가자는 야당 요구에 대해서도 새 정권은 뒷짐을 지고 있는가 하면, 용도폐기 소리가 높은 햇볕정책도 계승해 나가겠다고 공언하고 나섰다. 한-미 관계는 어떤가. 한마디로 DJ정권 때보다 더 심각하다. 언변 좋은 노무현 집권자가 무슨 말로 변명하든 “저래 가지고서야 반미 정권 소리 안 듣게 됐느냐”고들 격앙한다.

노 집권자는 ‘북한에 핵무기가 존재하지도 않는데 이를 문제삼아 (미국이)주한 미군을 철수하겠다는 것은 맞는 말이 아니’라며 부시 행정부를 나무랐다. 그러나 이건 정말 ‘맞는 말’이 아니다. 미국은 북한이 핵제조에 필요한 플루토늄을 숨겨 갖고 있으며, 언제라도 핵탄두를 제조할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집권측은 이런 미국 정보를 부인할 명백한 증거를 대야 할 것이다. ‘핵개발과 대량 살상무기 보유’는 북한 스스로가 밝힌 것이다. 한데 북의 고백마저 제쳐놓고 ‘핵이 없다’는 가정을 내건 것은 국가 지도자로서 할 말이 아니다.

철군도 그렇다. 미국 정부가 철군하겠다고 먼저 말을 꺼낸 건 분명 아니다. 촛불 시위다 뭐다 해서, 주로 노무현 후보를 지지한 세력들이 ‘미군 나가라’고 구호를 외친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시위대들은 반미구호를 외치며 성조기를 불태우고 용산 미군기지 담을 뛰어 넘었다. DJ 정권은 이를 막을 생각도 않았고, 노무현 당선자의 측근들 입에선 미군 기지 이전과 주한 미군이 갖고 있는 작전권을 한국군에 넘겨야 한다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국 내에서 이런 소란이 일자 미 언론은 ‘한국이 원치 않는다면 미군을 그냥 둘 이유가 없다”고 여론을 환기시켰고, 의회에선 이를 되받고, 급기야 행정부 관리 입에서도 ‘검토’ 소리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전후 사정이 이러함에도 노 집권자는 딴 소리로 부시 행정부를 비난한 것이다.

“바보인가, 낡은 이념 추종자들인가”

노 정권을 지지하건 안 하건, 과연 미군은 나가야 되는가 하는 문제를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만약 미군이 빠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핵무장까지 한 북한 정권이 존재하는 한 적화통일을 막기 위해선 방위비 예산을 두 배로 늘려 자위태세를 갖출 수밖에 없다. 국민의 세부담이 두 배로 는다는 의미다. 미군이 빠지면 외국 자본도 빠져나가고 불안한 한국에 투자할 기업도 없을 것이다. 미국과의 통상 격감도 불 보듯 뻔하다. 결국 경제는 망가질 수밖에 없다. 미군이 빠지면 중-러시아-일본 등 주변 강대국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가속될 것이다. 구한말을 답습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이런 미국에 대해, 여중생 사망사건 등 군 작전 시 사고나 부대 주변환경 오염 같은 부차적 문제를 시비 삼고 본질적인 국가이익을 외면하려는 사람은 두 부류 중 하나라고 한 국방대학원 교수는 해석했다. 너무도 뻔한 국익 계산서조차 읽지 못하는 바보천치거나, 아니면 지구상에서 폐기처분된 공산사회주의를 흠모하는 추종자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물론 미군은 언젠가는 나가야 한다. 그러나 때가 있는 것이다. 새 정권은 그 때를 잘못 짚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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