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집으로’

2003-02-1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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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집으로’라는 한국 영화가 우리 집 근처 영화관에서 상영되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한국 영화가 미국 주류 영화관에서 이처럼 널리 유통되어 상영되기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집으로’를 보기 전에 이 영화에 관한 비평을 신문에서 읽었기에 나는 영화 줄거리를 대강 알고 갔다. 한가한 오후 시간인데도 100여명의 관객들로 극장은 만원이었고, 그 중에 한국사람처럼 보이는 동양사람도 몇 명 눈에 띄었다.

현재 나는 인생의 초점을 교육에서 목회로 바꾸기 위해 신학대학원에 다니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를 보면서 성경 속의 ‘탕자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친 모습으로 한숨을 짓고 있는 젊은 여인과 도심지에서 자란 그녀의 아들을 태운 버스가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리고 있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관객인 우리는 그 여인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모른다.

성경 이야기의 탕자처럼 그 여자는 사랑하는 부모 곁을 떠나 대도시인 서울에서 헛된 인생을 살아온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돈도 없고, 직장도 없고 남편도 없는 상황에 처한 그녀는 버릇없는 상우라는 어린 아들을 자신이 자란 산촌 마을로 데리고 오고 있다. 아이를 자기 어머니에게 맡기기 위해서다.


허리가 구부러지고 손 마디가 굵고 거친 할머니 모습은 손자에게 괴물로 보였고, 그래서 손자는 할머니를 멀리하며 비웃는다. 그럼에도 늙은 할머니는 손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돌본다. 도시에서 버릇없이 자란 손자는 할머니의 변치 않는 확고한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심 같은 자비로 할머니는 상우를 돌본다.

망나니 같은 손자는 할머니를 ‘병신이라고 부르며 비웃는다. 할머니에게 거짓말을 하고, 물건을 훔치고, 살림을 깨뜨리고, 일부러 할머니가 맨발로 먼길을 걸어가도록 신발을 감추는 등 못된 짓을 한다. 온갖 학대를 손자로부터 받으면서도 할머니는 참는다. 손자에게 화 한번 내지 않으며 손자를 보살핀다. 손자가 학대하면 할수록 할머니는 손자를 더욱 더 사랑한다. 손자의 행동이 난폭하여 질수록 그를 향한 할머니의 동정 또한 깊어진다.

상우를 향한 할머니의 변치 않는 사랑과 희생은 하나님의 이미지이다. 상우는 방황하는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이기적이고 은혜를 모르는 손자는 할머니의 사랑을 거부하며 반항한다. 그는 앙심을 품고 요강을 일부러 깨뜨리기도 한다. 물론 그의 분노는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오로지 할머니의 변함 없는 사랑만이 이기적이고 버릇없는 손자를 사랑스러운 손자로 변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메시지는 간단하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한다. 사랑이 사랑을 낳았다. 이것이 내가 이 영화 속에서 본 크리스천 메시지이다. 나의 크리스천 메시지가 불교나 유교의 메시지와 별로 다를 게 없다. 어떤 진리는 너무도 명백하기에 누구에게나 그것은 돋보이게 된다.

탕자 손자의 비유 이야기 이외에도,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도 재미있는 포인트가 이 영화에 있다. 할머니가 만든 음식을 거부하며 먹지 않는 장면이 있다. 한국 사람들도 이 장면을 보면서 상우의 철없는 행동을 보고 웃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상우와 비슷한 행동을 한국 어른들의 행동에서 보았다.

아프리카에 선교를 갔을 때 나는 한국 사람들과 생활을 같이 한 적이 있다. 아프리카 현지인들이 우리들에게 정성껏 음식을 대접하였다. 보통 감자튀김, 쇠고기 덩어리, 바나나 튀김, 과일 등이었다. 나의 한국인 친구들이 식사 때 김, 고추장, 라면을 보따리에서 꺼내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볼 적마다 나는 미소를 짓곤 하였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접대를 왜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그들을 섬기기 위해서 온 선교사들이 아프리카 사람들과 동일감을 갖지 못하는 장면이 아닌가. 할머니의 음식이 이상하다고 거부하는 상우와 얼마만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들 모두가 (나 자신도 포함하여) 이 반항하는 소년과 얼마나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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