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 식민지 소녀의 회상에 덧붙여

2003-02-1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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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의 시선은 TV화면에 묶여 있었다. 온통 피난민 물결이다. 한국 국적기임을 알리는 마크가 선명한 보잉 여객기가 착륙한다. 순간 눈물이 고인다.

걸프전이 발발했다. 자국민 철수를 위해 여러 나라 여객기들이 도착해 수송 작업을 펼친다. TV화면이 어지럽다. 그 가운데 KAL기 모습이 선명히 드러난다. 한국민을 철수시키기 위한 특별편이다. 그 광경에 그 분은 창연히 눈물을 흘린 것이다.

옛날 일이 생각나서 그랬다고 했다. 그 옛날 일이라는 건 1920년대, 그러니까 어린 소녀때 그 분이 중국 상해에서 겪은 경험이다. 어찌보면 아주 사소한 일이다. 한 소녀의 감상일 수도 있다.


그 때만 해도 뭔가 소요만 발생했다 하면 상해에는 열강의 군함이 들어왔다고 한다. 자국민 보호가 명목이다. 각국 군함들이 잇달아 입항하는 광경은 어린 소녀였던 당시로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열을 지어 행진하는 수병들의 모습이 얼마나 가슴을 설레게 했던지.

그렇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게 있었다고 했다. 이탈리아도, 프랑스 군함도, 일본 수병의 모습도 보이는데. 유독 한국의 군함이며, 한국의 수병은 안들어 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병사들의 행진이 끝나고 구경군이 사라져도 한참 멍하니 서있었다고 했다.

“그 때 얼마나 서러웠는지. 그제서야 어렴풋이 알게됐지. 우리에겐 보호해줄 나라가 없다는 사실을.” 이제는 하늘 나라에 가 계신 그 분이 12년전에 해준 이야기다. 근 80년전 중국 땅을 유리하던 한 식민지 소녀의 회상을 새삼스레 떠올린 것은 다름이 아니다. 죽음을 피해 만주 땅에서 방황하고 있는 탈북자들 이야기들이 너무 아프게 다가와서다.

한국서는 반(反)미 이야기가 한창이다. 미국서는 반(反)한이다. 그 연결고리는 북한이다. 그 반한의 스토리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탈북자 이야기가 새삼 클로즈업 되고 있다.

동시에 믿어지지 않는 보도도 나온다. 보트 피플이 돼 중국을 탈출하려던 58명의 탈북자가 체포됐다. 전체 가족이 섞여 있다. 또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는 3대가 걸쳐 있다. 어렵게 북한을 탈출해 자유를 찾아 한국을, 또 일본을 향해 떠나려던 순간 그들은 중국 공안에 모두 체포된 것이다. 그 자체로도 엄청난 비극이다.

‘사실이라면…’이라는 단서가 붙어야겠지만 그 스토리를 더 비극적으로 만들고 있는 건 이런 부문이다. 누군가 한국 정보당국자가 중국측에 연통을 해 체포된 혐의가 짙다는 것이다. 월 스트릿 저널 보도다. 이 보도가 나온 게 지난 1월23일이다.

몇주 후 북한 탈북자를 돕는 독일인 의사 노베르트 폴러첸은 이런 주장을 하고 나섰다. 한국정부는 동포인 북한 주민의 고통은 당초부터 관심 밖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북한주민의 탈주를 한국정부 당국이 방해해왔고 보트 피플 탈출계획도 한국정부 당국자가 중국 측에 알렸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한국정부는 이 부문에 대해 물론 항의를 했다.) 말하자면 북한 주민도 자국민으로 간주하고 있는 한국 헌법을 당국자들이 위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반한의 목소리가 거세지면서 이런 지적도 나왔다. 북한주민의 참상, 또 탈북자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김정일에게 있다. 중국에도 있다. 그렇지만 한국정부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권운동가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람이 DJ다. 이런 그가 왜 북한주민의 고통, 탈북자의 참상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느냐는 지적이다.

더 심한 이야기도 나온다. 그건 한국민 전체에 대한 질타이기도 하다. “동계 올림픽 금메달 수로, 월드컵에서의 좋은 성적으로 한국의 자존감이 증대되고, 더 나아가서는 남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게 아니다. 이웃 형제의 고통에 동참해 그들의 자유를 위해 희생도 감수할 때 존경을 받을 수 있다.”

반한의 지적이 모두 옳다는 건 아니다. 그 행간에는 ‘언제부터 한국이 컸다고…’하는 오만도 엿보인다. 그렇지만 북한주민의 참상에 관심이 없다는 지적은 아무리 보아도 옳다. 4강에 심취해 있다. 네티즌시대 개막에 들떠있다. 그러면서 북한 주민의 참상을 알려는 데에는 지극히 인색하다. 지나친 자화자찬의, 그 시끄러운 소리가 밖의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언론은 휴머니즘이다. 정치도 휴머니즘이다. 휴머니즘이 빠지면 모든 건 공연한 말 장난이 되기 쉽다. 원칙이 없어진다. 우선순위에 혼란이 생긴다. 북한 문제와 관련해 한국이 몹시 혼란스럽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는게 아닐까.

몸을 팔아가며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탈북 여성. 너무 못먹어 어린이 같이 보이는 꽃제비 소년. 그 모습들이 새삼 눈에 아른 거린다. 아무런 도움을 기댈 수 없는 그들의 모습이. 동시에 이런 질문이 뇌리를 스친다. 민족이란, 국가란, 궁극적으로 코리안 아메리칸이란 무엇인가 하는 엉뚱한 질문이다.

옥 세 철 <논설실장>
secho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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