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와인의 숙성 오래 될수록 좋은 것 아니다

2003-01-2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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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포브스가 17만달러 구입 산산조각난
1787년 프랑스산 ‘샤토 라피트’ 최고가격
보관장소 없으면 사자마자 마시는게 좋아

세상에서 가장 비싼 와인은 무엇이고 가격은 얼마일까? 현재까지의 기록에 의하면 1987년에 포브스 매거진 주인인 말콤 포브스가 17만달러를 지불하고 구입한 1787년산 프랑스 보르도의 샤토 라피트(Chateau Lafite) 매그넘이 가장 비싸게 팔린 와인이었다. 이 병에는 이니셜 T. J. 가 쓰여있는데 이는 토마스 제퍼슨의 이니셜로, 그가 미국 최초의 주불 미대사로 프랑스에 갔을 때 구입하여 이니셜을 써넣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포브스가 구입한 샤토 라피트는 와인으로서의 가치보다 그 와인을 처음 구입했던 첫 주인의 이름이 병에 새겨진 덕분에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7만달러라는 가격에 팔렸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겠다.

이 비싼 와인을 어찌된 영문인지 포브스는 평소 친분이 있던 뉴욕의 한 와인스토어 주인에게 전시용으로 빌려주었다. 그리고 어느 날, 고객의 청을 이기지 못한 스토어 주인이 1787 샤토 라피트를 보여주려고 들고 오다가, 너무 긴장한 탓인지 발이 삐끗하며 넘어지는 바람에 와인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병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영화에서도 스토리라인으로 잘 쓰여지지 않을 법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병이 깨지는 순간 잠시 조용했던 스토어는 너도나도 스푼을 들고 달려들어 바닥에 흘려진 와인을 맛보려는 손님과 종업원으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787 샤토 라피트는 심하게 산화되어 단지 식초에 불과한 와인이었다고 한다. 말콤 포브스는 아주 오래된 식초 한병에 17만달러를 지불한 셈이다.


6년 전 일이다. 내가 가르치던 클래스의 학생이었던 진우라는 유학생이 나의 대학 후배에게 홀딱 반한 일이 있었다. 진우는 호화 사치 유학생은 아니었지만, 물건을 구입하는 수준이 꽤 높은 편이어서, 카메라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물건은 전문가 수준의 고급을 소유하고 있었다.

진우가 나파 밸리를 방문했을 때 친구들이 자기가 태어난 해에 만들어진 와인을 구입하는 것을 보고 자기 아버지 탄생년인 1942년산 와인을 한 병 사가지고 왔는데, 내 후배 줄리를 감동시키기 위해 아낌없이 그 와인을 딸테니 날더러 줄리 좀 데리고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다시 올 것 같지 않은 기회를 놓칠 수 없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줄리를 설득하여 내 룸메이트와 함께 진우의 아파트로 갔다. 유감스럽게도 그 와인을 제조한 와이너리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데, 종류는 카버네 소비뇽이었고 가격은 거의 1,000달러라고 들었다.

진우가 코르크 따개를 가져와서 와인을 따는 동안 다들 긴장해서 지켜보았다. 부스러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의 매우 축축하고 소프트해 보이는 코르크가 빠져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서 포도주의 향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진우가 먼저 맛을 보고 우리 모두의 잔에 조금씩 와인을 따라주었다. 잔을 돌려서 냄새를 맡을 필요도 없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미로운 향이 코속을 파고들었다. 첫 모금을 마시는 순간 입술에서 혀에서 느껴지는 그 맛으로 인해 시간도 공간도 다 멈추고 나는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잊고 단지 와인의 향과 맛만을 느끼고 있었다.

따고 나서 조금 시간을 둔 후에 잔에 따라 마시긴 했지만, 그래도 첫 잔이 그렇게 부드럽게 느껴진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와인은 정말 달았다. 설탕이 단 것처럼 그렇게 단 맛이 아니라, 전혀 모나지 않은 너무나도 부드러운 맛이어서 달콤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오만가지 맛을 그 와인 한 모금에 느낄 수 있었다. 세상 음식 중에 이렇게 다양한 맛을 포함하고 있는 게 있을까 싶게, 그 와인 한 모금에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맛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맛들이 다 서로 밸런스를 이루며 너무나도 부드럽게 혀로 목으로 넘어갔다. 다들 입에서 절로 신음이 새어나왔고, 시간이 지날수록 와인은 점점 더 맛있어졌다.

내가 두잔째를 비웠을 때 진우는 더 이상 내 잔에 와인을 따르지 않았다. 난 병에 묻은 와인 방울이라도 핥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 날 진우와 줄리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지만 진우가 바라는 대로 연인 사이로 발전하지는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전에도 그 후에도 그런 맛을 경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6년이 지났지만 그 때의 감동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품종, 당도, 병사이즈
오크통속서 숙성시간
보관하는 환경따라
맛 최고조 기간 달라

와인은 무조건 오래될수록 맛이 좋아지는 게 아니다.
와인도 사람처럼 생명이 있고, 절정기가 있다. 보통 인간이 25~30세를 기준으로 육체의 아름다움을 조금씩 잃어가고 늙어가듯이, 와인도 절정기가 지나면 그 맛을 잃고 서서히 식초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기온이 낮고 햇빛이 좋은 해에 오랫동안 나무에 매달려있다가 수확된 포도가 좀 더 깊은 맛과 향을 지니게 되고, 좀더 오랜 기간 숙성될 수 있다. 포도가 수확될 때까지 줄기에 매달려있던 기간뿐만 아니라, 포도 품종에 따라, 당도와 산도와 알콜 농도에 따라, 병 사이즈에 따라, 병으로 옮겨지기 전 오크통 속에서 숙성된 시간에 따라, 보관되는 환경에 따라 와인의 맛이 최고조에 달하는 기간은 달라지게 된다.

호두를 깨서 얇은 껍질을 벗기지 않고 그냥 먹었을 때 입에서 느껴지는 떫은 맛을 태닌(tannin)이라고 하는데, 태닌이 와인의 생명을 연장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태닌이 더 많이 들어있는 적포도주가 태닌이 적은 백포도주보다 생명이 더 길다. 하지만 독일 리즐링처럼 신맛이 강한 백포도주와 불란서 소테른처럼 단맛이 강한 백포도주는 그 생명이 적포도주에 못지 않게 길다. 신맛과 단맛 또한 와인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와인이 절정기에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고려할 조건이 너무 많으므로 딱 잘라서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카버네 소비뇽을 예로 들자면 대개 3년이 지나면 너무 어리다거나(young) 강한 맛이라고 느껴지지 않고, 좋은 환경에서 5~10년을 보관하면 잘 숙성하여 부드럽고 깊은 맛을 낼 것이다. 리저브(reserve)라고 표기된 것은 동급 중에서도 약 6개월간 더 오크통 속에서 오래 숙성된 후 병으로 옮겨진 것이므로, 좀 더 오래 숙성시킬 수 있다.

아주 좋은 해에 출시된 고급 카버네의 경우는 수십년 동안도 보관이 가능하고, 매그넘이라 불리는 1.5리터짜리 큰 병에 든 와인은 숙성 기간이 더 길고, 반대로 375ml 병의 와인은 훨씬 그 기간이 짧다. 대개의 카버네 소비뇽은 3년 정도 지난 후에야 마켓이나 스토어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와인을 보관할 좋은 장소가 없다면 사자마자 마시는 편이 좋다. 똑같은 와인을 두 병을 구입해서 3년후와 6년후의 맛을 비교해보는 것도 숙성된 와인의 맛을 배우는 데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최선명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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