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소파에서 잠자는 제임스 본드

2003-01-16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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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초에 아내는 자기 동생이 고집이 세다거나 자기 어머니가 지나치게 충고하기를 좋아한다거나 등, 자기 식구들의 흠을 들추어 가끔 자신의 불만을 나에게 호소하였다.

한번은 아내가 동석한 자리에서 나의 동생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때 일어났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나는 대화 중에 아내 식구의 흠을 동생에게 말하였다. 아내는 동생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동생이 우리 집 문을 나서자 마자 나에게 큰 벼락이 떨어졌다. 그 이유는 내가 아내 가족의 흠을 남에게 말하였다는 죄였다. 그 죄값으로 나는 며칠동안 소파에서 자야 하였던 것을 기억한다. 한국에서 지금 제임스 본드가 그때 나와 같은 곤란한 상황에 처하고 있는 것 같다.

북한사람을 향한 남한사람들의 태도가 이런 성향을 갖고 있지 않나 싶다. 한국사람들은 북한 정부를 향하여 ‘극악 무도한 악질 정부’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똑같은 말을 미국사람이 하면 문제가 된다. 미국사람들이 한국을 불공평하게 대하고 한국사람을 무시한다고 말한다.


북한사람들이 지상에서 가장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은 세상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실이고, 특히 한국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다. 영화 ‘다른 날 죽다(Die Another Day)’에서는 오히려 제임스 본드가 북한 정권을 관대하게 묘사하고 있다. 북한정부가 붕괴될 때,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만행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한국에서 007 영화를 보이콧하는 것은 영화 속에서 북한정권을 잔인하게 표현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휴전선 위쪽 북한 땅이 무시무시한 곳이라는 것은 남한 사람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북쪽의 잔인한 행위가 세상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다. 더구나 북쪽의 잔인한 일들이 영어로 만든 영화를 통하여 온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오래 전에 내가 아내에게 범하였던 일과 비슷한 일일 것이다. 집안의 흠을 남에게 알렸다고 나는 벌을 받았던 것이다. 지금도 아내는 가끔 식구들의 결점을 나에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반복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오래 전에 경험하여 잘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한국사람과 결혼한 미국인 남편으로서 지켜야할 첫번째 법칙은 다른 미국사람들에게 한국에 대하여 부정적인 말을 절대로 하지 않아야 하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의 근본적인 차이중 하나는, 동양은 진실보다는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반면에 서양은 진실을 관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 기독교문화인 서양문화 속에 길들어진 우리는 진실을 밝히기 위하여 상대방과 정면 대결을 하기 때문에 관계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 정부의 북한 대책). 유교문화인 동양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진실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다 (남한 정부의 햇볕정책). 이러한 문화차이로 동양과 서양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갈등이 생긴다.

한국에서 ‘다른 날…’이 북한을 부당하게 묘사하였다고 보이콧되고, 반미정서가 한층 더 뜨거워지고 있다는 뉴스를 듣는다. 어떤 사람들은 영화에서 묘사된 절이 한국식 절이 아니라고 비판하며 절에서 일어나는 섹스 장면이 한국문화를 모독한다고 혹평한다. 어떤 사람은 영화에 나온 소가 필리핀 소이지 한국소가 아니라고 불평한다. 영화를 둘러싼 논쟁 때문에 나는 지난주에 그 영화를 보러갔다.

내가 보기에는 그 영화는 단지 하나의 오락거리 영화이다. 악한과 아름다운 여자, 그리고 007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아슬아슬하게 탈출하고, 최신 특수효과로 만든 폭발 장면, 신기한 도구들로 가득 찬 액션영화에 불과하다. 끝에 가서는 악이 지고 007이 여자를 갖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북한이 나쁘지만 남한사람에게 그들은 형제이다. 남이 자기 형제의 흠을 말하는 것과 자기가 형제의 흠을 말하는 것은 한국사람에게는 천지 차이이다. 남한사람들이 007을 방에서 내쫓아 소파에서 잠자게 만드는 이유를 나는 어느 정도 이해할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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