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부시와 흰 눈

2003-01-0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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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좋은 것은 하얗기 때문이다. 소복이 쌓인 눈 위에 손가락으로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놈’이라고 썼다가도 지우고 싶으면 한번 흩뜨리기만 하면 된다.

순간의 복받치는 감정으로 썼든 주위의 분위기에 몰려 어쩔 수 없이 썼든 힘들이지 않고 지울 수 있는 게 눈이다. 흉중에 묻어 두었던 생각을 고스란히 드러냈더라도 거두고 싶으면 간단히 되돌릴 수 있는 게 눈이다.

상식의 경계를 넘는 언사로 불필요하게 상대를 자극하는 표현도 눈 위에서는 백지에서처럼 손쉽게 고쳐 쓸 수 있다. 구구절절이 맞는 내용이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본래의 의도가 굴절되면 안타깝지만 없었던 일로 하면 되는 게 눈의 미학이다.


눈에 묻어 두어야 할 표현은 지천에 널려 있다. 아마도 우리가 하루에 사용하는 단어의 상당부분도 이에 해당할 것이다. 남의 아픈 곳을 후비고 자존심을 상하게 한 말과 글이 부지기수다. 평범한 사람들의 경우도 이러한데 권력자들이 내뱉는 말의 파괴력에 대해선 부언할 필요가 없다.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몰고 김정일을 ‘피그미’에 견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서로를 원수처럼 미워하고 있는 가운데 북한 핵 문제가 불거졌다. 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부시와 김정일의 사감으로까지 번지고 있으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지속된다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총명한 보좌관들에 둘러 쌓여 있다지만 최종결정은 부시의 몫이다. 가까운 곳에서 수시로 내놓는 참모들의 ‘솜사탕 조언’뿐 아니라 멀리서 들려오는 쓴 소리에도 귀를 열어 두는 게 그의 책무이다.

역사의 울림을 들어야 한다. 역사는 부시의 정적이 정략적으로 기술한 것이 아니라 시대를 관통하는 교훈을 담은 것이니 겸허하게 되새겨야 한다. 로마제국이 왜 망했는지, 스페인 제국이 왜 문을 닫았는지, ‘해지지 않는 나라’ 영국이 왜 ‘석양의 나라’로 전락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상황은 다소 다르지만 오늘의 미국도 이들 제국처럼 세계를 호령하고 있고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팍스 아메리카나’가 영원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의 기도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부시의 정책에 대해서 손톱만치의 이해관계도 없다. 그러므로 평화를 갈구하는 이들의 간청을 그저 종교인들의 비현실적인 중얼거림으로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물정 모르는 성직자들은 으레 평화를 외치게 마련이라고 폄하하면 ‘어리석은 군주’란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미국과 손잡고 피를 흘린 동맹국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지적되는 ‘일방주의의 위험’을 못들은 채 해서도 안 된다. 이들 동맹국은 미국이 잘 돼야 자신들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것을 잘 안다. 국익의 동반관계에 있는 우방이다. 그러니 우정어린 조언을 한 우방을 ‘건방지고 의리 없는 우방’으로 몰아치면 순순히 풀릴 일도 꼬이게 된다.

행정부 내 반대의견도 경청해야 한다. 부시 행정부라고 하지만 어느 조직과 마찬가지로 소수의견이 있는 법이다. 민주당원이 아니라 공화당원이면서 부시의 정책에 동조하지 않는 목소리가 그것이다. ‘내 식구’의 반대가 진정한 반대일 수 있다. 이를 소외시키는 것보다 수렴하고 조율할 줄 알아야 한다.

민초의 마음도 읽어야 한다. 대통령의 존재 이유가 민초의 행복에 있는 연유에서다. 북한 핵 문제를 이라크 문제보다 더 심각하다고 보는 미국인이 2배나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그리고 국민 대다수는 위기의 평화적 해법을 선호하고 있다. 평화를 위해 불가피하게 무력을 사용할 때가 있지만 “지금이 그 때”라는 레토릭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부시가 묶고 있는 워싱턴에는 눈이 가득하다. 지난해 구사했던 말과 정책을 수북한 눈 위에 올려놓고 ‘득’보다는 ‘실’이 많았던 부분은 모두 뒤덮는 ‘큰그릇’이길 바란다.

박 봉 현 <편집위원> bong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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