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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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 싶다

2002-12-1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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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한국도 여론조사 기법이 선진화돼 웬만한 선거 결과는 예측이 가능하다. 지난 97년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후보가 2-3%대로 신승할 것이라는 예측도 잡아냈다. 한데 이번 대통령 선거에선 난다 긴다하는 여론조사 전문가들도 입을 다물었다. 여론조사 수치상으로는 분명 민주당 노무현후보가 강세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곧 ‘당선’과 연결된다고 단언하기를 주저한 때문이다. 그 이유는 대충 세 가지로 압축됐다. 하나는 노무현 지지세력들의 ‘바람몰이’가 딱히 표로 연결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 어느 선거 때보다 부동층이 많다는 사실이 두 번 째 이유다. 이회창후보 지지자들은 여론조사 때 정보기관의 도청의혹 때문인지 ‘표심’을 숨기고 답변을 회피하는 경향이 농후했다는 게 3번 째 이유였다.
선거 결과를 점치는 것은 따라서 무모한 모험일 것이다. 필자는 이번 대선을 둘러싸고 많은 이들이 “참 희한 일도 많았다”며 고개를 갸웃거린 몇 가지 미스터리를 소개함으로써 대선 감상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번 선거의 메이저 미스터리는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와 사전 음모설”이다.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막후의 조종자가 시나리오도 쓰고 무대감독도 했다는 의혹의 한 가운데엔 ‘단연코 DJ가 있다’는 야당 쪽 의혹제기에서 비롯됐다. 무명 정치인 노무현의 등장이 그 의혹의 첫 장을 장식했다. 이는 이제 의혹을 넘어 정설로 굳었다.
야당에선 정몽준의 등장도 미스터리의 맥락에서 주목했다. 만약 노무현의 인기가 초장 인기를 그대로 유지했다면 정몽준은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정몽준과 노무현을 저울질하는 과정의 ‘숨은 그림 찾기’는 이미 널리 알려진 대로다. 결과적으로 정몽준의 등장은 이회창에 더블 스코어로 주저앉은 ‘노무현 일병 구하기’와 무관치 않다고 보는 의혹설에 무게를 얹었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대선의 흐름을 결정지은 중요한 변수가 있었다. ‘이익치 폭로’다. 한 때 현대증권 회장으로 정주영 가의 측근 가신이었다가 주가조작 혐의로 검찰 수배를 받고 외국으로 내뺀 이익치씨가 느닷없이 정몽준 죽이기에 나섰다. “정몽준 후보가 주가조작에 관련됐다”는 게 폭로의 골자인데, 여론조사에서 노무현과 이회창 모두를 앞선 정몽준 인기도는 이 폭로로 낙화유수가 됐다. 그는 그 미묘한 시기에 왜 ‘정몽준 죽이기’에 나섰을까. 그는 DJ정권 초기 ‘세풍’을 폭로해 이회창을 궁지에 몬 장본인이다. 이번에도 집권세력과의 “모종 묵계 아래” 정몽준 인기를 끌어내리고 노무현을 구하려는 작전에 동원됐다는 의혹이 정가에 떠돌기 시작했다.
노무현과 정몽준의 후보 단일화 협상 또한 미스터리 덩어리다. 민주당이 반분되는 내홍을 겪을 때만 해도 정몽준은 단일후보로 자신이 결정될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하지만 노무현 쪽의 후보단일화 협상을 덥석 받아들이고 그 게임에서 보기 좋게 나가 떨어졌다. 여론조사에 의한 단일화라는 정치사상 초유의 드라마 게임에서 진 뒤 정몽준은 “대노한 것”으로 전해졌다. 참모들 말을 들었다가 결과적으로 노무현 쪽에 속았다고 장탄식을 했다는 말도 들린다. 민주당 국회의원 상당수가 자기를 지지하면서 당을 뛰쳐나와 놓고도 웬일인지 선 듯 합류하지 않은 채 세확산에 무게가 덜 한 민주당 내 원외 인사들이 줄줄이 정몽준 캠프 문을 노크한 것도 지금 보면 이상하긴 했다.
그 대표적 인물이 김민석 전 의원이다. 이 30대 말의 운동권 출신 정치인은 이념적으로 DJ의 전위세력 중 핵심이다. 서울시장 선거를 놓고 민주당 후보로 내세울 사람이 없다고 야단법석일 때, 국회의원직을 내던지고 야당의 이명박후보와 결판을 내겠다고 나선 민주당 골수파다. 이철, 박범진 등 친 DJ세력들도 정몽준 핵심 브레인으로 들어왔는데, 정몽준은 이들과 머리를 맞대고 비밀 전략회의를 수도 없이 했다. 비밀은 과연 얼마나 지켜졌을까.
정몽준이 끝내 노무현 쪽이 제의한 여론조사방법을 받아들인 것도 문제의 당내 참모들이 여론조사를 하면 반드시 이긴다고 호언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노무현 승리로 결판이 난 직후 정몽준 캠프의 한 간부는 필자에게 내뱉듯이 말했다. “정몽준의 성곽은 트로이의 목마로 붕괴됐다!” 민주당 측의 ‘위장 투항’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후회였다. 하지만 이 미스터리들을 거대한 콘텍스트에 끼워 넣으면 의혹은 또 제기된다. 과연 정몽준 자신도 한 주역이었는지, 아니면 억울한 희생자였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이런저런 미스터리의 진위는 과연 밝혀질 수 있을까? 아마도 영원한 미스터리 자체로 묻힐 공산이 더 크다. 그게 정치다.

안영모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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